Ο 마니산 (해발 472.1m)
강화도 남서단에 위치하고 한반도의 중앙에 자리잡고 있어 마니산을 중심으로 한라산과 백두산까지의 거리가 같다. 마니산이 단군이 제천할 정도의 명산으로 용이 승천하고 용마가 나왔으며, 신선이 사는 곳으로 72대 왕후장상이 나올 곳이라 한다. 마니산 정상에는 단군성조께서 하늘에 제천의식을 봉행하신 참성단이 있으며 ‘88 세계 장애자 올림픽을 비롯 매년 전국체전시 성화를 채화 봉송하고 있는 민족의 영산이다.
등산로를 따라 918개의 돌계단을 올라가노라면 서해바다 풍경이 한눈에 들어와 아름다운 경치를 만끽할 수 있으며, 동쪽 기슭으로 신라 선덕여왕때 지은 정수사 법당 살문짝 꽃무늬의 아름다움도 즐길 수 있다.
마니산은 해발 472.1m 로 세 봉우리가 나란히 있어 먼 곳에서 보면 그 모앙이 아름답고 웅장한 명산으로 참성단은 그 중간 봉우리에 위치하고 있다. 참성단 인근 헬기장에서 보면 남쪽으로 서해의 여러 섬이 보이고 맑은 날에는 북한 개성의 송악산도 보인다.
Ο 마니산과 관련된 유적
– 강화 참성단(江華 塹星壇)
사적 제136호
참성단은 고려사나 신동국여지승람에는 단군이 천제를 올리던 곳이라 전하고 있는데 경주의 첨성대처럼 기초는 하늘을 상징하여 둥글게 쌓고 단은 땅을 상징하여 네모로 쌓아 하원상방형을 이루고 있다.
1270년 11에 보수했으며, 1639년과 1700년에도 고쳐 쌓았다. 여러 번 고쳐서 쌓았기 때문에 본래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지만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형태와 지금의 모습이 거의 비슷하다. 제단은 작은 자연석을 지름 8.7m로 둥글게 쌓은 하단과 각 변을 6.6m로 네모반듯하게 쌓은 상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역대 왕조가 거행했던 이곳 참성단의 행사를 보면 고구려 유리왕 19년에 사슴과 돼지를 제물로 하여 제사를 지냈고 백제의 비류왕은 몸소 현지에 나와 제사를 지냈으며 근세에 이르러 윤희황제 때까지 해방 후에는 전국체육대회가 부활되고 이곳에서 성화를 점화 하였다.
지금도 해마다 개천절10월 3일에 하늘에 제를 지내는 제천 행사가 거행된다. 1953년부터 전국체전의 성화와 2014년 인천아시안게임 성화도 이곳에서 채화했다.
성화 채화시 군수가 제주가 되어 제천을 올린 뒤 7선녀에 의해 태양열을 화경으로 발화 하거나 흐린날에는 부싯돌로 성화를 점화하였는데 7선녀의 유래는 단군께서 단을 쌓아 제천하실 때 신녀가 향그릇을 만들고 있었다는 기록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참성단 제레 전과정 시연 동영상 보러가기
– 강화 참성단 소사나무 (江華 塹城壇)
천연기념물 제502호
참성단 내에 있는 소사나무로 전형적인 관목 모습에 나무 갓이 단정하고 균형 잡혀 있으며, 참성단 하단의 돌단 위에 단독으로 서 있기 때문에 한층 돋보이는데, 규모와 아름다움에서 우리나라 소사나무를 대표한다.
소사나무는 자작나무과의 낙엽소교목으로 한국 특산종이며, 나무의 수형은 잎이 작고 줄기가 고목의 모습을 가져 예부터 분재 소재로 많이 사용된다.
– 참성단 중수비(塹城壇重修碑)
문화재자료 제13호
화도면 흥왕리 산42-1번지의 마니산 참성단에서 화도면 사기리 함허동천 방향, 즉 동동남쪽으로 약 270m 쯤 가면 능선 남쪽 아래에 있다.
이 비는 참성단을 중수한 사실을 기록한 것으로, 가파른 암벽에 가로 50cm, 세로 105cm 크기의 비 윤곽을 만들고 그 안에 8행 238자를 새겨 넣은 것이다.
강화유수 최석항(崔錫恒)이 관내를 순찰하다가 마니산에 올라 참성단이 무너진 것을 보고 선두포별장(船頭浦別將) 김덕하(金德夏)와 전등사총섭(傳燈寺總攝) 신묵(伸默)에게 명하여 보수한 것을 담고 있다.
비문은 우선 강화도가 나라의 방패가 되는 중요한 지리적 요건을 갖춘 지역이며, 그 마니산은 천신에게 제사지내는 명산이라는 것이다.
최석항은 당시의 참성단이 “수천년을 지났으니 비바람에 씻기고 깎여 서북 양면이 반쯤 무너졌고, 동편 계단이 기울어져 고을 사람들이 서로 이를 개탄했다.”고 한다. 중수공사는 10일만에 끝났고, 1717년 5월에 비가 세워졌다.
– 마니산 등정문
송면재(1822~1824년) 강화유수가 재임시절인 1823년 10월에 마니산에 올라 남긴 기록으로 자연석 바위에 새겨 놓았다. 마니산 참성단과 참성단 중수비 사이에 있다.
– 강화 참성단 천재궁 터
시도기념물 제24호
화도면 문산리는 참성단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낼 때 사용한 제사그릇(祭器)과 제사물건을 준비하던 재궁이 있던 곳이다. 만들어진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고려때 목은 이색이 지은 시를 쓴 현판이 있었고, 조선 태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이곳에 머물며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고 전하는 것으로 보아, 이미 고려때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현재 천재궁터는 삼단의 석축으로 되어 있으며, 넓이는 약 70평 정도로 부근에는 함부로 들어오지 말라는 표시인 금표와 우물들이 남아 있다.
– 금표
천제암궁지로 오르는 산길 바로 우측 바위에 새겨진 각자(刻字)로 가로 55cm, 세로 61cm의 면적에 “금표(禁標) 갑자팔월(甲子八月) 입(立)”이라고 새겨져 있다.
금표는 이곳이 신성한 지역임을 알리고 마니산에서 벌채를 금하고 관청에서 양목(養木)하는 일을 주관한다는 표시이다.
– 정수사
보물 제161호
강화군 해안남로1258번길 142번지 화도면에 위치한다.
1957년 이 법당을 보수 공사할 때 1689년 수리를 하면서 적은 기록을 발견했는데, 1423년에 새로 고쳐 지었다는 내용이었다.
정수사는 전등사, 보문사와 더불어 강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찰중의 하나이다. 이 절은 신라 선덕여왕8년(639)에 회정선사가 마니산의 참성단을 참배한 후 이곳 지형을 보고 불자가 가히 삼매 정수할 곳이라하여 사찰을 세우고 정수사(精修寺)라 했는데 그 후 함허대사가 절을 중수한 후 법당 서쪽의 맑은 물을 발견하고 정수(淨水)로 바꾸었다.
원래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3칸이었으나 후대에 전면 툇간을 달아내어, 현재는 측면이 4칸이다.
– 함허동천(涵虛洞天)
화도면 사기리 방면에서 마니산을 오르는 입구 계곡에 위치한 함허동천은 조선 전기의 승려 기화(己和)가 마니산 정수사를 중수하고 이곳에서 수도 했다고 해서 그의 당호인 함허를 따서 ‘함허동천’ 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계곡의 너럭바위에도 기화기 썼다는 ‘涵虛洞天” 네 글자가 선명하게 남아있는데 ‘구름 한점 없이 맑은 하늘에 잠겨 있는 곳” 이라는 똣이다.
함허동천은 산과 물이 묘한 조화를 이루고 빼어난 경치를 자랑하는 곳으로 함허대사가 이곳을 찾아 ‘사바세계의 때가 묻지 않아 수도자가 가히 삼매경에 들 수 있는 곳’ 이라고 하였다.
인근데 희정선사가 창건하였다는 정수사가 있으며 마니산 정상에는 국조 단군께서 하늘에 제사를 드리기 위하여 쌓은 참성단이 있다.
또한 함허동천은 우리나라 최초로 오토캠핑장으로 시작하여 현재는 가족 캠핑장으로 운영하고 있다. 수려한 경관과 맑은 물이좋아 연중 인파가 끊이지 않는다.
Ο 고려산 (해발 436m)
강화6대산의 하나로 마니산(472.1m),혈구산(466m),진강산(443)m 다음으로 높은 산이다.
원래 이 산의 이름은 오련산 이었는데 1232년 고려가 천도하면 고려의 이름을 딴 고려산으로 우리나라 유일의 국산(國山)이다. 1696년 편찬된 강도지에 홍릉과 국정,적석,백련등의 세 절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신증동국여지승람」에 강화부 서쪽 15리에 있으며 강화부의 진산이다. 라고 되어 있다.
고려산은 고려의 정기를 품고 있는 산으로 신성한 연못의 물고기가 중국 천자에게까지 영향을 미쳤고, 연못의 연꽃이 떨어진 다섯 곳에 오련사를 지었으며 고구려 장수 연개소문이 태어난 전설이 있는 곳으로 곳곳에 적석사, 백련사, 청련사 등 사찰과 고인돌군락지, 고구려 토성, 오련지, 홍릉 등 문화재가 분포하여 아침에 역사탐방 위주의 산행이 좋다. 서쪽 적석사를 가다보면 솔밭을 지나고 갈대밭을 지나 낙조봉을 만날 수 있는데 저녁에 서해 수평선 바닷물을 붉게 물들이며 해지는 광경은 [강화8경]중 하나이다.
또한 북쪽 산등성이로 매년 4월이면 진달래가 흐드러져 보는 이의 마음도 붉게 물든다. 매년 4월 3째주를 전후하여 강화군 대표축제인 고려산진달래축제를 개최하고 있다.
고려산 주변의 유적
– 고려산성
고려산성이 있는 고려산은 강화 6대 산의 하나이며, 고려시대 이후 읍치의 진산으로 성은 동북쪽 일원에 위치해 있다. 둘레가 1190m이고, 토석혼축과 석축이 혼합된 토석성이며, 형태는 정상부와 조그마한 계곡을 감싸고 있는 포곡식 산성이다. 산성의 축성 연대는 명확하지 않으나 대체로 고려시대라고 전해지고 있다.
산성의 구조는 토축으로서 둘레가 1만 9,372척이었다는 기록이 보이며 또 토축성으로서 3정 48칸 4척(414.6m) 둘레라는 설, 1만 9,372척이라는 구설(舊說)을 동시에 제시하면서 구설이 옳은 것 같다는 주장도 있다. 또 이 산성이 토축이며, 높이가 5척(1.5m), 폭이 2칸(3.6m), 둘레가 864칸 (1,355.2m)이라는 기록도 나타난다. 이 중에서 육군박물관 조사단의 실측결과인 1190m와 가장 유사한 것은 후자일 것이다.
-고려산 오련지
고구려 장수왕 4년 인도의 고승 천축조사 절을 짓기 위하여 함경도에서 부터 남쪽으로 내려 오면서 절을 지을만한 터를 물색했으나 이상하게도 처음에는 절터로 좋아 보이다가도 일단 정하고 나면 마음에 들지 않기를 수 없이 되풀이하다가 이곳 강화도에 도착하여 그만 지쳐 잠을 청하게 된다.
조사는 꿈속에서 생시인가 비몽사몽 간에 내일 이 산 꼭데기에 오르면 연못이 있을것이다. 라는 노인의 말에따라 오련산 산정으로 올라가 보니 신기하게도 5개의 연못이 있었으며 연못에는 하얗고 노랗고 까맣고 푸른색의 연꽃이 피어있는것을 보고 조사는 춴하는 곳에 연꽃을 날려 가람터를 찾게된다.
노란꽃이 떨어진 곳에 황련사를, 빨간꽃이 떨어진 곳에 적련사를 하얀꽃은 백련사 청련꽃은 청련사라 이름 붙였는데 하나는 조사가 원하지 않는 엉뚱한곳에 떨어져 원통하다는 뜻의 원통암을 지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후 적련사는 자주 화재가 발생하여 적석사로 이름을 바꾸어 부르게 됐다.
지금 고려산 정상을 중심으로 4개의 연지가 남아있고 복원된 1곳은 샘이 철철 흘러 넘쳐나고 있다.
– 강화 삼거리고인돌 군
- 지정번호 : 기념물 제45호
- 소재지 : 인천 강화군 하점면 삼거리 산 118 외
고인돌은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으로 지석묘라고도 부르며, 주로 경제력이 있거나 정치권력을 가진 지배층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의 고인돌은 4개의 받침돌을 세워 돌방을 만들고 그 위에 거대하고 평평한 덮개돌을 올려놓은 탁자식과, 땅속에 돌방을 만들고 작은 받침돌을 세운 뒤 그 위에 덮개돌을 올린 바둑판식으로 구분된다. 강화 하점면 삼거리 고인돌군은 강화읍에서 48번 국도를 따라 인화리 방면으로 가다 송해면과 하점면 경계지점을 지나 부근리-망월간 도로의 중간지점인 진촌마을에 있다.
진촌마을은 고려산 북서쪽 능선 상에 위치한 마을로 이 지역 일대에 탁자식 고인돌 9기가 일렬로 분포되어 있다. 어떤 고인돌무덤은 덮개돌 위에 작은 구멍이 여러 개 패여 있는데 이러한 모양을 남한에서는 성혈이라고 하고 북한에서는 별자리와 연관 짓고 있다.
작은 구멍이 있는 고인돌무덤의 크기는 고임돌의 높이 2.80m, 너비 0.90m, 두께 0.38m이다. 고인돌무덤 가까이에는 돌을 떼어 낸 흔적이 남아 있는 채석장이 있다.
– 강화 고천리고인돌 군
- 지정번호 : 기념물 제46호
- 소재지 : 인천 강화군 내가면 연촌길18번길 96
고인돌은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으로 지석묘라고도 부르며, 주로 경제력이 있거나 정치권력을 가진 지배층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의 고인돌은 4개의 받침돌을 세워 돌방을 만들고 그 위에 거대하고 평평한 덮개돌을 올려놓은 탁자식과, 땅속에 돌방을 만들고 작은 받침돌을 세운 뒤 그 위에 덮개돌을 올린 바둑판식으로 구분된다.
강화고천리 고인돌군은 인천광역시 강화군 고려산의 서쪽 능선을 따라 해발 350∼250m 지점에 18기의 고인돌무덤이 흩어져 있다. 이 고인돌군은 우리나라 고인돌무덤이 분포하는 평균 고도보다 훨씬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이 특이하다.
대부분의 고인돌무덤들은 무너져 원형이 많이 훼손된 상태이다. 그 중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는 탁자식 고인돌무덤은 덮개돌의 크기가 가로 3.35m, 세로 2.47m, 두께 0.65m이다. 고인돌군이 위치한 주변 지역에 고인돌무덤을 만들기 위하여 돌을 떼어 낸 흔적이 남아 있다.
– 백련사
인천광역시 강화군 하점면 고려산로61번길 270 (부근리
고구려 장수왕 4년 병진(서기416)에 고려산을 답사하던 천축조사가 이 산 상봉 오련지(다섯개의 연못)에 오색 연꽃이 찬란히 피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 오색 연꽃을 따서 공중에 날려 그 연꽃들이 떨어진 곳마다 절을 세웠는데 바로 이곳이 그중 하얀 연꽃이 떨어진 곳이다. 조선 고종 광무9년(서기1905) 을사년 봄에 인암화상이 화주 박보월로 이 절을 중건케하고 서기1967년 정미년 봄에 비구니 한성탄이 극락전과 삼성각을 중수 하였다. 조선 순조 6년 병인년(1806년) 3월에 서산대사 제6세손 천봉후인 의해당 처월대사의 사리비와 부도탑이 건립되었고, 서기1983년 비구니 한성탄이 도로 불사와 서기1986년에 범종을 조성 하였으며, 철불아미타불 좌상이 보물994호로 서기1989년에 지정되었고, 그해 12월 11일날 도난당했다. 기록에 의하면 팔만대장경이 본 가람에 한때 봉안되었다 한다.
– 청련사
강화군 강화읍 고비고개로188번길 112
고구려 장수와 4년(서기416년)병진해 천축조사께서 개산창건하고 청련사라 했다. 신라 실성왕 15년 동진안제 의회 12년 백제 전치왕 12년 불기 1443년 조선 순조왕 21년(서기 1820)신사해 화주비구니 포겸스님에 의하여 당 사찰을 중건하는 등 그뒤에도 여러차례의 중건중수를 거쳐 왔으나 건물이 워낙 낡고 퇴락하여 1979년 4월 주지 비구니 황법우 스님이 고려 건축양식으로 현존의 큰 법당을 신축하였다. 본 사찰 위쪽에 원통암이라고 하는 작은 암자가 있었으나 1984.5.29 청련사와 합병하였다
– 적석사
강화군 내가면 연촌길 181 (고천리)
적석사는 고려산 서쪽에 위치해 있다. 고구려때 천축국 스님이 고려산에 올라 다섯색의 연꽃이 피어있는 오련지를 발견하고 다섯송이의 연꽃을 날려 그 연꽃이 떨어진 곳에 절을 세웠다. 그 중 붉은 연꽃이 떨어진 곳에 적련사를 세웠는데 그곳이 이 절의 전신이다. 적석사 뒤편 산정상은 낙조봉이라 불리며 이곳에서의 낙조는 강도팔경의 하나로 꼽힐만큼 아름답다.
Ο 별립산 (해발 399m)
강화군 하점면과 양사면 사이의 경계 지점에 위치한 산이다. ‘강도지’에 “강화부 서쪽 20리에 있다.”고 기록되어있으며 ‘대동지지’와‘대동여지도’ ‘조선지지자료’에서 별립산이라는 지명이 확인된다.
강화도의 다른 산들과 산줄기가 연결되어 있지 않고 따로 떨어져 있다고 해서 별립산이라는 이름이 부여되었다고 전해지며 산 전체적으로 바위가 많고 호랑이가 앉아 있는 모양 이라고 해서 준호산이라는 별칭도 있다.
현재 정상에는 군부대 시설물로 인하여 산행은 강화군 하점면 창후리 서해유스호스텔에 주차 후 산길로 1시간 정도 올라가야 된다.
산행 중 중간 중간 서해 바다와 섬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아름다운 장관을 볼 수 있다.
별립산 주변유적
별립산 주변에는 고려시대 고분과 크고작은 고인돌이 산재해 있다.
– 무태돈대
- 지정번호 : 문화재자료18호
- 소재지 : 인천 강화군 하점면 창후1리 151-1
돈대는 해안가나 접경 지역에 쌓은 소규모 관측·방어시설이다. 병사들이 돈대 안에서 경계근무를 서며 외적의 척후 활동을 비롯한 각종 수상한 정황을 살피고 대처한다. 적이 침략할 때는 돈대 안에 비치된 무기로 방어전을 펼친다.
1679년(숙종 5) 5월에 완성된 48돈대에 이후 5개 돈대가 추가로 지어졌다. 48돈대는 황해도·강원도·함경도 승군 8,900명과 어영청 소속 어영군 4,262명이 80일 정도 걸려서 쌓았다. 돈대 축조를 기획하고 감독한 이는 병조판서 김석주였고 실무 총괄은 강화유수 윤이제였다.
무태돈대는 1679년(숙종 5)에 쌓은 48돈대 가운데 하나로 인화돈대·광암돈대·구등곶돈대·작성돈대와 함께 인화보의 관할 하에 있었다. 방형 구조로 둘레가 145m, 석벽의 높이는 120~530㎝이다. 창후리 포구에서 북쪽 길로 간다.
– 원층사지
- 지정번호 : 문화재자료9호
- 소재지 : (23015) 인천 강화군 하점면 이강리 산 177
별립산(別立山) 남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이 절터를 마을 사람들이 아직도 원층골이라 부르고 있는 사실로 보아 『강도지(江都誌)』에 언급된 원층사터 임을 알 수 있다. 사찰의 규모는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석재유물로 미루어 꽤 큰 사찰로 생각된다. 불상은 보이지 않지만 큼직한 연꽃무늬 대좌(臺座)가 남아 있어서 석불상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또한 석탑 부재들도 꽤 많이 남아 있는데 특히 석탑 옥개석은 모두 남아 있으며, 3단의 옥개받침이나 독특한 수법은 고려시대의 작품임을 잘 말해주고 있다. 『강도지』의 기록대로 고려 조정이 강화도로 도읍을 옮겼던 시기의 사찰로 추정되며, 현존하는 석탑이나 불상의 부재들은 당시의 불교 미술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별립산성
별립산은 강화 북단에서 제일 높은 바위산으로 <삼국사기>의 기록과 같이 가파르고 초절하며 옛날에는 봉천산, 별악봉과 함께 바닷물로 둘러 싸여 있는 강화도와는 별개의 섬처럼 이어져 있었다. 그리고 각종 문헌에 기록된 바 없는 토성터와 산성터가 연구자의 현지조사 결과 밝혀졌다.
Ο 봉천산
강화군의 하점면과 양사면 사이의 경계에 위치한 산으로 봉두산, 하음산 이라고도 부른다. ‘강도지’에 “봉두산은 곧 하음산인데 봉수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대동여지도’에 하음산이라 표기되어 있고 정상부에 봉수, 산남쪽에 하음현 치소가 잇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고려시대에 하음백으로 봉해졌던 하음 봉씨 봉천우라는 사람이 봉천대를 쌓았다고 전하는 산이다. 봉천우는 봉천대에서 자신의 조상을 도와준 하늘에 제사를지냈다고 한다. ‘강화부지’에 “봉두산은 강화부 북쪽 이십리 떨어진 곳에 있으며 하음산이라고도 한다.
산 위에 봉천대와 석축이 있으며 옛날 하음현이 그 아래 있었다. 조선시대에 산의 정상부에는 봉수가 설치되었으며, 봉수산 주변에는 옛 하음현 시대의 하음산성, 조선조 하음산 봉수와 보물로 지정된 고려시대 5층석탑, 석조여래입상등 많은 문화재가 분포해 있다.
산행은 강확군 하점면사무소에 주차 후 잘 정비된 등산로를 따라 약 40분 정도 올라가면 되고 중간에 약수터도 있어 잠깐 쉬어갈 수 있다. 한 코스는 하점면 장정리 오층석탑 주차장에 주차 후 역시 30~40분 정도 산행으로 정상에 오를 수 있다.
봉천산 주변의 유적
– 하음산성
하음산성은 하점면 신봉리 산63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이 산성의 정상에 오르면 사방의 조망이 아주 좋다. 동쪽으로는 유도와 연미정이, 서쪽으로는 별립산과 교동이, 남쪽으로는 고려산이, 북쪽으로는 구등곶돈대와 예성강이 한눈에 들어온다.
산성은 정상과 봉천대를 둘러싸고 있는 290m 규모의 테뫼식 산성이다. 이 산성의 동·서·북면은 급한 경사를 이루고 있으며, 남면은 비교적 완만하여 사람들이 가장 많이 다니는 등산로이다.
산성 내부에는 봉천대가 위치하는데, 이것은 현재 하음산봉수로 알려져 있다. 봉수는 서쪽으로는 교동의 화개산 봉수와, 동쪽으로는 남산봉수(또는 송악산봉수)와 응하고 있다. 봉수는 조선시대 제5거에 속하는 직봉체계 중의 하나였다.
산성은 고구려시대에는 중요한 관방시설로서 역할을 수행하다가 고려시대 이후에는 그 중요성이 낮아져서 폐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산성은 해양전략적 가치로 볼 때 매우 중요한 성이었다. 그것은 관측과 초계장소로서의 유리한 조건, 주변에 포진한 보조 방어체계와의 유기적인 작전 수행 가능성, 구체적인 방어전술의 유리함 등으로 살펴볼 때 고구려와 백제에게 모두 중요했던 관미성이었을 가능성도 제시되고 있다.
따라서 문헌기록이 매우 적은 하음산성에 대해서는 고고학적 발굴작업이라든가 전략적 가치의 기준에서 보다 구체적이고 치밀한 연구결과가 있어야 될 것으로 사료된다.
-하점면 장정리 오층석탑
고려후기의 석탑으로 일명 봉천탑이라고도 한다. 일찍이 쓰러져 파손되었던 것을 1960년에 각 부재를 수습하여 보수 재건하였다. 그러나 파손이 심하고 없어진 부재도 많아 현재는 3층 이상의 옥신(屋身)과 5층 옥개석(屋蓋石), 그리고 상륜 부재가 모두 유실된 상태다.
이 석탑은 단층기단 위에 5층의 탑신을 건립하고 정상에 상륜부를 장식한 방형중층(方形重層)의 일반형 석탑으로 여러 개의 장대석으로 지대를 구축하고 그 위에 기단을 받치고 있다. 기단면석은 4매석으로 구성되었는데 2면은 우주가 있는 판석이고 다른 2면은 면석만으로 되었고, 탱주(撑柱)는 모각되지 않았다. 갑석(甲石)은 두꺼운 1장의 판석을 덮고 있는데, 아랫면에는 부연(副椽)도 없다. 윗면은 약간의 경사가 있고 중앙에는 1단의 굄대를 마련하여 탑신부를 받치고 있다.
탑신부는 초층 옥신이 두 개의 석재로 이루어졌고, 초층 옥개석 이상은 옥신과 옥개석이 모두 1장씩으로 되어 있다. 초층 옥신은 크기가 다른 2매석에 큼직한 우주형(隅柱形)이 모각되었다. 2층 옥신은 초층에 비해 높이와 넓이가 급격히 감축되었고, 우주형은 형식적으로 표시되었다. 옥개석은 비교적 평박한 편으로, 아래면의 받침은 초층이 4단이고 2층부터 4층까지는 3단으로 줄어들었다.
추녀 밑은 직선이나 네 귀퉁이에 이르러 가볍게 반곡(反曲)을 보였고, 낙수면은 반곡없이 흘렀으며 전각(轉角)의 반전은 매우 적은 편이다. 2층 이상의 옥개석도 양식은 같으나 크기에 있어서는 체감되었으며, 각 층에 파손이 심하여 전각부는 거의 대부분이 깨어져 있다. 상륜부의 부재는 하나도 남은 것이 없다.
강화의 사찰에 원래 탑이 없어는지 아니면 훼손되어 없는것인지 사찰에 탑이 없다. 이 오층석탑이 현재 남아있는 사탑 중 유일한 것이다.
– 장정리 석조여래 입상
강화군 봉천산 아래에 있는 고려시대의 석조불상으로 두꺼운 화강암의 판석에 돋을새김으로 했는데, 현재는 전각을 지어서 그 안에 모시고 있다.
민머리의 정수리 부분에는 상투 모양의 작은 머리(육계)가 솟아 있다. 타원형의 얼굴에는 살이 올라 있는데 눈·코·입의 표현이 다소 둔중해 보인다. 귀는 비사실적으로 길며, 목이 짧아 3줄의 주름인 삼도(三道)가 가슴까지 내려와 있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은 두껍게 표현되어 신체의 굴곡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으며, 좁고 둥글게 처리된 어깨선으로 인해 불상은 어딘지 모르게 움츠러든 모습이다.
U자형의 옷주름은 가슴에서부터 흘러내려 무릎 부분까지 표현되었는데 형식적이며 간략하게 처리되었다. 오른손은 허리 아래로 내려 손바닥을 밖으로 향하고 있고, 왼손은 가슴 앞으로 들어 손가락을 구부리고 있다. 불신의 주위에는 2줄의 도드라진 선으로 몸광배와 머리광배를 구분하고 있다. 2줄 사이에는 드문드문 둥근 구슬을 새겨 넣었으며,
머리광배와 몸광배의 가장자리에는 불꽃무늬를 새겼다. 평판적이고 선으로 조각하는 경향이 두드러진 불상으로 모든 면에서 단순화, 생략화 되는 점은 시대가 내려가는 것을 말해준다. 양감이 있는 얼굴, 짧은 목, 움츠린 어깨, 형식적인 옷주름 등에서 고려시대 불상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봉천대
봉천산 꼭대기에 설치하여 하늘에 나라의 태평과 백성들의 평안을 빌었던 곳으로, 돌을 쌓아올려 위로 갈수록 좁아드는 사다리꼴 형식을 하고 있다. 『강도지』에 의하면, 고려 때에는 나라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제천의식을 거행하였던 곳이었으나, 조선시대 중기에 와서는 봉화를 켜두는 봉화대로 사용하였다 한다.
진강산 (해발 443m)
강화군 양도면 능내리·도장리·삼흥리·하일리에 걸쳐 위치한 산으로 강화에서3번째로 높은산이다.
조선시대 진강현의 진산으로 알려져 있으며 산 정상부에봉수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강도지와대동여지도에 진강산이 표기되어 있으며 산 정상부에 봉수가 확인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과여지도서에도 산 이름이 나오며, 강화부지에는“강화부성 남쪽 삼십리에 있는데 산등성이가 낙타 등과 같다.
그 아래로 촌락이 번성하여 옛 진강현이 있었다. 또한 산에목마장이 있었는데 지금은 폐쇄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같은 자료에 “진강산 봉수는 동쪽으로 대포산에 응하고 서쪽으로 망산에 응한다.”고 되어 있다.
진강산 주변에는 고려새대 왕릉 3기가 산재되어 있다.
진강산 주변의 유적
– 강화 석릉
- 지정번호 : 사적 제369호
- 소재지 : 인천 강화군 양도면 길정리 산 182번지
고려 21대 희종(熙宗, 재위 1204∼1237)의 무덤이다. 『고려사』에 의하면 ‘1237년(고종 24) 8월에 희종이 57세로 법천정사(法天精舍)에서 승하하자 낙진궁(樂眞宮)으로 옮겨졌으며, 10월에 덕정산(德政山) 남쪽 석릉에 장례를 지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희종은 1204년에 신종의 양위를 받아 즉위하였다.
최충헌이 권력을 남용하자 1211년 내시 왕준명(王濬明) 등과 함께 최충헌을 죽이려다가 실패하였다.
이로 인해 최충헌에 의해 폐위당하여 강화로 쫓겨났다가 이어 용유도로, 교동도로 옮겨졌다가 1219년 귀양에서 풀려나 개경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1227년 복위의 음모가 있다는 무고로 다시 강화로 쫓겨났다가 교동으로 옮겨졌고, 법천정사에서 죽었다. 묘역의 하단에는 정자각이 위치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흔적을 확인할 수 없으며, 2단에 1기의 석인상, 봉분 옆에 1기의 석인상이 남아있다.
특히 석릉은 강화에 있는 다른 왕릉과는 달리 봉분 뒤편에 곡장을 두른 것이 특징이다. 조선 현종 때 강화유수 조복양이 강화의 고려 왕릉을 확인하고 보수하였으며, 매년 능참봉을 파견하여 관리하였다고 한다.
1895년 이후 관리가 소홀해졌고 일제 강점기 때에 도굴되어 폐허가 되었던 것을 1974년 보수 정화하였다. 2002년에는 남한에 있는 고려왕릉 최초로 발굴하여 유구를 확인하였고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발굴 당시 청자편을 비롯하여 관장식용 금속류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 강화 가릉
- 지정번호 : 사적 제370호
- 소재지 : (23057)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도면 강화남로633번길 16 (능내리)
고려 제24대 원종의 비 순경태후 김씨(順敬太后 金氏)의 무덤이다. 순경태후는 최씨 무인집권자 최우의 사위인 김약선의 딸로서 1235년(고종 22) 원종이 태자가 되자 태자비인 경목현비가 되었으며, 다음해에 충렬왕을 낳고 사망하였다.
1262년(원종 3) 정순왕후로 추대되고 아들인 충렬왕이 즉위(1274)하여 순경태후로 높여졌다. 가릉은 강화에 있는 왕릉과는 달리 지상식 석실 구조를 갖추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현재 석실의 전면에는 유리벽을 설치하여 내부를 볼 수 있도록 되어있다.
일반적으로 봉분 뒤에는 반달 모양으로 두둑하게 토성(土城)을 둘러쌓거나 돌담을 쌓은 곡장이 있으나 가릉에는 사성(莎城), 곡장(曲墻)이 없이 약간 경사진 평지에 봉분을 쌓아 올린 형태이다. 묘역은 3단의 장대석단을 설치한 것으로 보아 고려시대 왕릉의 형태를 갖추었음을 알 수 있다.
봉분이 붕괴되고 석조물은 파괴된 채 폐허가 되었던 것을 1974년 보수하였고, 2004년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발굴한 후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봉분 주변에는 현재 한 쌍의 석수가 있고 봉분 앞에는 석인상 한 쌍이 남아 있을 뿐 석물들이 파괴 또는 유실되어 당시의 모습을 확인할 수 없다.
– 강화 곤릉
- 지정번호 : 사적 제371호
- 소재지 : 인천 강화군 양도면 길정리 산 75
고려 제22대 강종의 비 원덕태후 유씨(元德太后 柳氏)의 무덤이다. 원덕태후는 종실 신안후(信安候) 성(珹)의 딸로 왕실 동성을 피하기 위하여 유씨라 하였으나 누구의 성을 따랐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유씨는 1212년(강종 1)에 왕비로 봉해졌고 연덕궁주(延德宮主)라 하였으며, 고려 23대 고종의 어머니이다.
이후 원덕태후로 추존되었고, 1253년 정강(靖康)의 시호가 더해졌다. 곤릉은 전체적으로 3단으로 되어 있다. 봉분과 석축, 곡장(曲墻)은 붕괴되고 석조물은 없어진 채 폐허가 된 것을 1974년 보수, 정화하였다. 본래 묘역은 고려 후기의 왕실 묘제를 따라 문·무인석의 석조물이 있었다고 전해지지만 현재는 묘표만 남아 있다. 상단에는 곡장이 파괴되어 없어졌고 그를 대신해서 봉분 뒤에 반달 모양으로 두둑하게 토담을 둘러쌓아 놓았고 그 안에 원형 봉분이 있다.
봉분하단 전면에는 둘레돌이 일부 복원되어 있다. 2단 중앙에는 작은 묘표가 있는데, 묘표에는 ‘고려원덕태후곤릉(高麗元德太后坤陵)’이라 새겨져 있다.
일반적으로 2단에는 석인상이 배치되어 있는데 곤릉에는 석물이 모두 유실되어 흔적을 찾아볼 수 없으며 하단에는 정자각이 위치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자리가 정비되어 있다. 2004년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발굴하였고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 능내리 석실분
인천광역시기념물 제28호
강화 능내리 석실분은 고려시대의 왕릉급 무덤이다. 무덤 앞 양편에는 망주석으로 추정되는 사각 석주가 남아 있으며, 사각 석주의 3면에는 내용을 알 수 없는 문양이 양각되어 있다.
고려시대 지배층의 무덤으로 알려진 이 고분은 과거 도굴로 인하여 석실이 노출되어 있어 보존·정비의 필요성이 꾸준히 제기됨에 따라 이를 위한 발굴을 2006년 말에서 2007년 초에 이르기까지 실시하게 되었다. 석실 내부는 화강암을 잘 다듬어 축조되었으며, 봉분구조물과 석실, 건물지가 양호하게 남아 있어 고려시대 지배계급 묘제의 전형을 보여주는 사례로 확인되었다.
출토유물로는 청자편, 각종 금은제장식 파편, 유리그릇편·구슬류, 상부원보(祥符元寶) 1점, 은제못, 금박장식 관재 등 소량이지만 다양하게 출토되었다. 특히 봉황머리를 나타낸 은제장식편의 경우 문양이 있는 곳에만 도금처리하여 장식적 효과가 뛰어나도록 한 것이 특징적이다.
봉황문양은 전통적으로 왕비를 상징하는 문양으로 대몽항쟁기 강화에서 사망하였으나 능이 확인되지 않은 희종의 왕비인 성평왕후나 고종의 왕비인 안혜태후의 묘로 추정하고 있다.
Ο 해명산 (해발 324m)
해명산은 강화군 삼산면(석모도)에 위치한 해발 324m의 나즈막한 산으로 주변의 아기자기한 섬들과 서해바다, 마을을 바라보며 힐링을 겸한 산행을 할 수 있다.
해명산은 낙가산과 연결된다. 해명산 정상에서 보문사의 낙가산 정상인 눈썹바위를 거쳐 보문사를 갈 수있다. 산세가 험하지 않아 가족등반도 가능하다. 왕복 3시간 정도 소요된다
Ο 기타 강화의 산
혈구산 (해발 466m)
혈구산은 강화에서 2번째로 해발 높은 산으로서 강화의 6대 산 가운데 하나이다. 이 혈구산 아래에는 군사들이 훈련을 했다는 습진벌성(習陣풌城)이 있다. 1898년에 측도한 일본지도에는 석성동(石城洞)이라는 지명이 있다. 현재도 성터가 아직 부분적으로 남아 있고, 동문 서문터와 영청동(營廳洞) 등 터이름이 남아 있다.
강화군 길상면 선두리에 위치한 산으로 ‘강도지’에 “부의 남쪽 30리에 있고 둘레가 30리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신증동국여지승람에 “ 강화부 남쪽 30리에 있으며 주위가 13리이고 목장이 있다.고 되어 있다.‘강화부지’에도 목장이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여지도서’와‘대동지지’,‘조선지지자료‘에 지명이 기입되어 있다. 예로부터 왕에게 진상했다고 하는 일명 사자족애라고 부르는 약쑥이 많이 났다고하여 유명한 곳으로 길상산 동사면 장흥리에는 지금도 쑥밭다리라 부르는 자연마을이 남아있다. 1706년(숙종32) 길상면 선두리와 화도면 사기리 사이의 갯골 약 1km를 막아서 선두포 둑을 쌓아 이 일대 농경지를 개간했다고 전한다.
별악산 (해발167m)
강화군 양사면에 위치한 산으로, 특징이 없는 봉우리이다. 동쪽에서 올라오면 악산인줄 모른다. 서쪽에서 올라오면 암봉을 올라와서 별악산이란걸 알수있다. 동쪽과 서쪽에 전망바위가 있으며 조망권이 대단히 좋다. 별악산 정상은 동서 방향 평화전망대, 가운데는 둥그스런 모양새인데 서쪽 전망바위에는 밧줄이 설치되어 있다.
화개산 (해발259m)
강화군의 교동면 고구리에 위치하고 있는 산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현 남쪽 3리에 있다. 이색의 시에 ‘바다속 화개산은 푸른 하늘에 닿았는데 산위 옛사당은 언제 지었는지 모르겠네. 제사한 후 잔 마시고 이따금 북쪽을 바라보니, 부소산 빛이 더욱 푸르구나’ 하였다. 응암 월곶 바다 가운데 있다.” 고 기록되어 있다. 화개산성은 포곡식으로 길게 뻗어 있으며 산 정상 부분을 제외하고는 상당히 훼손되어 있는 상태이다. 산 정상에서 서북쪽으로 50m 떨어진 연봉 정상에는 봉수지가 위치하고 있는데, 이는 고려시대부터 사용 되었던 봉수라 전해지며 지금도 봉수대의 하부 석축들이 잘 보존되어 있다.
수정산 (해발126m)
강화군 교동면에 위치한 나지막한 산으로, 교동은 원래 화개산, 수정산이 따로 분리가 되어 있었으나 오랜 자연풍화작용과 고구려때부터 이어온 간척작업으로 하나로 합쳐 졌다. 수정산의 정상에 오르면 교동의 넓은 평야가 한눈에 들어오고 북녘의 땅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봉구산 (해발147m)
강화군 서도면 주문도에 위치한 산으로, 서도면의 섬에 있는 산들 중에서 제일높다. 봉구산 주변은 해발 105m의 구릉지가 “중앙부에 있으며, 남동쪽과 북서쪽에 비교적 넓은 평지가 발달하여 농경지가 넓게 분포한다. 동쪽 해안에 둥글고 완만한 만이 형성되어 있으며 해안선은 매우 단조롭다.
정족산 (해발220m)
강화군의 길상면 온수리에 위치한 산으로 산 정상부에 일명 삼랑성이라고도 부르는 정족산성이 소재하며 전설에 의하면 삼랑성은 단군이 세 아들을 시켜서 쌓은 성이라 전하나 확실치 않다. 이 산에 전등사가 있기 때문에 전등산이라고도 부르며, ‘해동지도’에도 산성이 있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으며 ‘대동여지도’에서는 정족산이라는 지명이 확인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