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에 관향을 두고 있는 성씨는 크게 강화를 본으로 하는 성씨와 진강을 본으로 하는 성씨, 하음을 본으로 하는 성씨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먼저, 강화를 본으로 하는 성씨의 경우는 최(崔)·위(韋)·황(黃)·고(高)·전(田)·노(魯)·한(韓)·김(金)·이(李)·유(劉)·운(雲)씨가 있다.
다음으로 진강(鎭江)을 본으로 하는 성씨는 노(魯)·소(蘇)·만(萬)·정(井)씨가 있다. 하음(河陰)을 본으로 한 성씨는 이(李)·전(田)·봉(奉)·정(鄭)씨가 있다. 마지막으로 교동(喬桐)을 본으로 한 성씨는 인(印)씨가 있다. 이 중에서 몇몇 성씨의 유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Ο 강화 김씨
강화 김씨는 동계이면서 3파로 나뉘어져 있다고 한다. 신라 경순왕의 후예로, 1파는 경순왕의 셋째 아들 김명종(金鳴鍾)의 7대손 김성(金晟)을 기세조로 한다. 그가 하음백(河陰伯)에 봉해져 후예들이 강화파라 하였다.
또 한 파는 김명종의 18대손 김광(金光)이 병조참판으로 있다가 연산군 때의 무오사화(戊午史禍)에 화를 입어 평남 숙천에 정착함으로써 1파가 되었으니 즉 숙천파이다. 그리고 김광의 4대손 훈련원주부(訓鍊院主簿)를 지낸 김송학(金松鶴)을 기세조로 하는 1파가 있는데, 이를 의주파라고 부른다.
Ο 강화 노씨
노씨의 시조는 계(啓)로 원래는 요동 사람이다. 주(周) 난왕(王) 때에 진(秦) 나라가 혼란을 겪게 되자 기자 조선으로 피난하였다가 애왕 때에 부교사도(敷敎司徒)가 되어 팔조지교(八條之敎)를 베풀며, 정전법을 실시한 공으로 갑비(甲比)에 봉한 바 되었다.
그 후 위만의 난을 만나 태사 은중달(殷仲達)과 같이 왕을 모시고 금마군으로 피난하고 그 자손 인언(仁彦)이 처음에 경주부윤을 지내고 만년에는 양사면 북성리에 와 살아 강화 노씨의 시조가 되었다. 자손은 16대에 이르되, 번창하지 못하고 국내 각 처에 살고 있다.
Ο 하음 봉씨
하음은 현재 하점을 본으로 하고 있다. 시조는 봉우(奉佑)이다. 고려 인종 때 갑과에 뽑혀 벼슬이 좌복야(左僕射)에 이르렀고, 후에 하음백(河陰伯)에 봉해졌다.
1106년에 하점면 하음산 아래에서 한 노파가 우물가에서 석함을 발견했는데, 그 속에서 단아한 아이가 있어 왕에게 바쳤다. 왕은 그 아이가 장차 큰 인물이 될 것이라 하여 성을 봉으로, 이름을 우로 사명하였다고 한다. 시조 봉우가 하음백에 봉해져 후손들이 관향으로 삼아 계대(系代)하고 있다.
Ο 강화 위씨
강화가 본이다. 위씨의 조계(祖系)는 멀리 중국 태고시대의 황제(皇帝)의 손자인 전욱(컉頊)의 후손, 팽조(彭祖)의 후예이다. 팽조의 이름은 전간(箋?)이니 팽육종(彭陸宗)의 제3자로서 요나라 중신인 용성공(容成公) 선도인(仙道人)으로 중국 경조(京兆) 출신이다.
경조지방은 하나라 계(啓) 왕때에 위국(韋國)이 있었고 그후 많은 정치가·시인·문장가를 배출하였는데, 특히 당나라 때에는 정치가·사학자 등 수 없는 인재를 배출하여 출현시킨 바 있다. 그러나 당나라가 망하고 군웅이 활거한 난세인지라 후양(後梁)·후당(後唐)·후진(後晋)·후한(後漢)·후주(後周)로 5대가 바뀌었다.
이에 시조 위수여(韋壽餘)는 후주 말엽 중원에서 신생 고려로 960년(광종 11)에 건너왔다.4) 위수여는 고려 현종 때에 문하시중을 역임했고 강화현 개국백(開國伯)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안공(安恭)이다. 특히 그는 관복의 제정, 과거제도의 도입에 큰 공헌을 했다.
그후 7대 목종 때에는 문하시랑 평장사가 되었고 현종 2년에 궤장(?杖)을 하사받기도 했다. 그가 강화현 개국백이 되고 강화식읍 500호를 하사받게 된 것을 인연으로 후손들이 강화를 본관으로 삼았다. 그 뒤 소목(昭穆)을 밝힐 수 없게 되어 조선시대 인동현감(仁同縣監)을 지낸 위조(韋祖)를 낙향시조로 삼고 있다.
Ο 강화 이씨
시조는 이대평(李大平)이다. 고려 때에는 중랑장태보(中郞將太保)를 지냈고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에 녹훈되었다. 그가 세거한 곳이 하음이어서 강화를 본향으로 삼아 계대(系代)한다.
Ο 강화 최씨
시조 최익후(崔益厚)는 고려 때에 문과에 올라 사복시소경(司僕寺少卿)을 지냈다. 그런데 ≪씨족원류(氏族源流)≫에는 ‘그는 최충헌의 아들로 정당문학(政堂文學)·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를 지냈다’고 하였다.
한편 강화 최씨 시조 최익후는 최치원의 10대손이라고 하였는데, 확실히 알 수 없다고 하면서 최씨의 원조(遠祖)는 신라초의 사량군(沙梁君) 최씨라고 하기도 한다. 강화를 본향으로 삼기는 상서좌복시소경을 지낸 최익후에서 비롯된 것은 분명하다.
대대로 동성문 안에 살았으므로 동리 명칭을 본따 살창이 최씨라고도 부른다. 일파는 초리지에 살며 다른 일파는 각 군으로 분산 거주하나 자손이 그리 번성한 편이 아니다.
Ο 강화 전씨
하음이 본이다. 세조 때 승전내시정난좌익공신(承傳內侍靖難佐翼功臣) 하음군 균(河陰君畇)이 하음에서 출생하여 강화 전씨를 창조하고, 그 아들 충좌위사정(忠佐衛司正) 구복(龜福)이 강화에서 거주한 지 이미 14∼15대에 이른다. 후손은 여러 곳에 분산 거주하고 있다
<출처 : 신편강화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