Ο 진주(晋州) 강씨
대개 4파로 나누어 있다. 현재 월곶리에 사는 일파는 이조판서 이행(利行)의 후손 박사(博士) 학(?)이 이곳에 산 지 10여대에 이르렀고 옥림리 파는 진산부원(晋山 府院) 군 공목공 기(君 恭穆公 耆)의 후손 훈첨(訓僉) 세필(世?)이 이곳에 우거한 지 16∼17대에 이르렀으며, 지금은 덕포·초지·고능 등에 각각 분산 거주하고 있다.
덕포리(세내)에 사는 파는 경서(景픊)의 후손 일창(一昌)이 이곳에 와서 산 지가 6∼7대에 이르고, 양대에 걸친 절효정려(節孝旌閭)가 있었다.
건평리에 사는 파는 박사 중례(重禮)가 이곳에 살기 시작한 뒤 16∼17대에 이르고 있다. 덕성리에 사는 일파는 고려 진산부원군(晋山府院君) 이식(以式)의 후손 군자감주부(軍資監主簿) 현(鉉)이 이곳에 거주하면서 이미 13∼14대에 이른다.
Ο 제주(濟州) 고씨
솔정·지산·매음 등 각처에 살고 있는 고씨 일파는 문충공(文忠公) 득종(得宗)의 증손인 인상(仁相)에서 연유한다. 관찰사 인상은 강화 진강으로 귀양왔다가 그곳에서 사망하고 후손이 세 곳에 분거한 지가 이미 15∼16대에 이르고 자손이 번창하고 있다.
또 두운리·오두리·덕성리에 사는 일파는 영곡의 아들 통덕랑(通德郞) 응복(應復) 파로서 10여대에 이른다. 교산리 증산 및 삼거리에 사는 일파는 충정공(忠正公) 경(慶)의 후손 판관 봉명(鳳鳴)의 자손으로 10여대에 이른다.
창리에 사는 다른 일파는 통덕랑 인(仁)의 후손인데 15∼16대에 이르고 있다. 화도면 여차리에 사는 또 한 파는 사간(司諫) 덕신(德信)의 후손이며 10여대나 이곳에서 살고 있다.
Ο 현풍(玄風) 곽씨
11대 곽려(郭麗)의 자손 일부는 14대 곽호(郭琥)의 대 이래로 강화에 세거했다. 평양부윤(平壤府尹) 태부(泰富)가 처음으로 송해면 하도리에 와서 살았는데, 그 자손이 5∼6대에 이르러 일파는 인화리에 분거하였다.
Ο 청주(淸州) 곽씨
곽휘(郭揮)의 자손은 17대손 곽영(郭永)의 대 이래 강화에 살았다. 이판 지포 지흠(芝浦 之欽)의 후손 진사 임도(林道)가 처음 이곳에 온 후 5∼6대에 걸쳐 옥림리에 살고 있다.
Ο 능성(綾城) 구씨
판안동파(判安東派)인 구성량(具成亮) 이래 일부 자손들은 11대 구유관(具有寬)이 기묘사화 때 화를 피해 강화로 들어간 것을 계기로 당진에서 강화로 옮겨 세거했다. 기묘사화 당시 사직(司直) 유관이 그 동생 유홍(有洪)과 함께 비로소 불은면 고능리·넙성리 두 곳에 와 살았는데, 그 자손이 현달하여 15∼16대에 이르고 지금은 두운·삼동암·금월·냉정·길직 등지에 흩어져 살고 있다.
Ο 안동(安東) 권씨
영상(領相) 숙정공(肅定公) 철(轍)이 이곳에 들어온 뒤 두 파로 나뉘었다. 그 중 일파는 좌랑 개(愷)의 후손이요, 다른 일파는 충장공(忠莊公) 율(慄)의 후손으로 문무 양과에 오래 현달하였다.
도장리에 사는 파는 화천군(花川君) 양평공(襄平公) 감(톯)의 후손 호인(好仁)에서 비롯하였으며, 교동면 삼선리에 사는 파는 영가부원군 충정공(忠靖公) 고(皐)의 후손인 통정 처중(處中)의 자손이다.
용정리(진흥말)에 사는 파는 문정공 근(文正公近)의 후손인 부사 문정(文貞)이 이곳에 처음으로 와 산 지가 10여대에 이르며 각지에 분산, 거주하고 있다.
Ο 강릉(江陵) 김씨
신당리에 살고 있는 일파는 정국공신(靖國功臣) 지산군(支山君) 경의(敬義)의 후손 충립(忠立)의 자손들이며 지산군의 둘째 아들 진사 연(然)은 상방리에 자리를 잡았다.
신당리에 사는 다른 일파는 문승지(文承旨) 장포행(長浦行)의 6대손 성균생원 인진(仁鎭)이 그 종제 의진(義鎭)과 같이 와서 살게 된 자손으로 지금은 신문리 능내리에 각각 분산해 살고 있다.
Ο 경주(慶州) 김씨
계림군(鷄林君) 제숙공(齊肅公) 곤(?渠)의 후손 한손(漢孫)이 용정리에, 같은 후손인 통덕랑 경립(景立) 이후 송해면 상도리에 살고 있는 일파는 10여 대에 이르고 문벌로 이름난 집안이다.
하일리에 사는 일파는 원종공신(原從功臣) 공평공(恭平公) 영유(永濡)의 후손으로 이조 성종 때 참봉 성집(聲集)에서 비롯되었고 제숙공(齊肅公)의 후손인 현감 봉질(鳳簫)은 하도리에 터전을 잡았으며 또 다른 일파는 신삼리에 살고 있다.
Ο 경주(慶州) 김씨
계림군(鷄林君) 제숙공(齊肅公) 곤(?渠)의 후손 한손(漢孫)이 용정리에, 같은 후손인 통덕랑 경립(景立) 이후 송해면 상도리에 살고 있는 일파는 10여 대에 이르고 문벌로 이름난 집안이다.
하일리에 사는 일파는 원종공신(原從功臣) 공평공(恭平公) 영유(永濡)의 후손으로 이조 성종 때 참봉 성집(聲集)에서 비롯되었고 제숙공(齊肅公)의 후손인 현감 봉질(鳳簫)은 하도리에 터전을 잡았으며 또 다른 일파는 신삼리에 살고 있다.
Ο 김해(金海) 김씨
청백사 용강 수연(壽延)의 후손 통덕랑 진추(鎭秋)가 구 선원면 수암동에 와서 살기 시작하였고, 지금은 각지에 분산 거주하고 있다. 안경공(安敬公) 영정(永貞)의 7대손 통정 경(瓊)의 후손은 남산리와 창리에 살고 있다.
또한 충의공(忠毅公) 문기文起)의 후손 진사 희헌(希憲)이 처음 하음면에 살았는데, 건평과 외포리에 분거하였다. 구하리에는 백촌의 현손 대사간 경지(暻智)가 살기 시작하였으며, 장령에 살다가 읍내로 이주한 일파는 역시 백촌의 후손인 판관 종만(從萬)에서 비롯하였다.
고려 후기의 송암 질(秩)은 두문동(杜門洞) 제현(諸賢)의 하나로 그 후손 근립(根立)이 상방리에 와 살기 시작하였으며, 안경공 영정의 현손 봉상시직장(奉常寺直長) 진복(盡福)은 처음 화도면에서 살다가 후손이 월곶리로 이사하였다.
첨사 인숙(仁첻)이 장화리에, 지평 기손(驥孫)이 동막에, 충간공(忠簡公) 보(普)의 후손 통덕랑 재희(在熙)가 연리에, 호성공신(扈聖功臣) 분성군(盆城君) 준영(俊榮)의 후손 봉희(鳳希)가 주문리에, 판관 자종(自宗)의 후손 천원(天源)는 교동면 지석리에 와서 살기 시작한 뒤 10여대에 이르고 있다.
Ο 안동(安東) 김씨
판결사(判決事) 익원공(翼元公) 사형(士衡)의 후손 양(良)이 자점(自點)의 역모 사건으로 인하여 초지로 피해 와 정착하였다. 상신(相臣)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 질(?)의 후손 정태(正台)는 오상리에서 살기 시작하였고,
고려 때 충열공 방경(方慶)의 원손 응호(應浩)가 망월리에 왔다가 삼흥리(옛 흥천)으로 이사하여 10여대를 살고 있다. 선행리에서 월곶으로 이사한 일파는 김만숙의 후손이며 도장리에 사는 일파는 통정 김녕(金?)의 후손인데 그 자손이 10여대를 살고 있다.
Ο 청풍(淸風) 김씨
오상리·황청리·볼음도에 사는 일파는 좌리공신(佐理功臣) 월천군(月川君) 길통(吉通)의 후손 익용(翊用)에서 비롯했고, 병자절신(丙子節臣) 약천(若天)의 현손이 최초 선원에 와 살다가 그 후손은 각지로 분거하고 있다.
그러나 오상리에 사는 일파만이 춘방 양사 동래부사 허주와 일석(一錫)에게로 출계하였다. 신봉리(각곡)에 사는 일파는 문의공(文毅公) 정우당(淨友堂) 식(湜)의 손자 흥운(興運)이 이곳에 와 살기 비롯해 자손이 10여대에 이르렀다.
Ο 해풍(海豊) 김씨
인산리에 사는 일파는 한림 예종(禮宗)의 후손 동몽교관(童蒙敎官) 순형(舜衡)이 풍덕에서 오상리에 이사하였다가 그 후손이 다시 이곳으로 이사하였다. 숭뢰리(금곡)에 사는 일파는 동래부사(東萊府使) 의(義)의 증손 중세(重世)가 수원으로부터 이곳으로 이사하여 자손이 8∼9대에 이른다.
Ο 고성(固城) 김씨
훈판 춘무(春茂)가 상방리에 와 살기 시작한 뒤부터 14∼15대에 이르고, 한 일파는 도장리로, 다른 일파는 금월리로 각각 분산해 살고 있다.
Ο 나주(羅州) 김씨
23대손 김수신(金守信)의 자손이 25대손부터 2∼3대에 걸쳐 강화에 살았다.
Ο 무장(茂長) 김씨
양사면 덕하리에 살며, 장사군(長沙君) 선(璇)의 후손 하(河)에서 비롯하여 15∼16대에 이르고 있다.
Ο 언양(彦陽) 김씨
고려시대 시중 김취려(金就勵)의 21대손 상익(相益)의 아들 면희(冕熙)가 강화로 낙향하여 살기 시작하였다.
Ο 의성(義城) 김씨
교동 읍내성에 사는 일파는 안국(安國)의 후손 승지 명진(命珍)이 처음 대아촌에 와 살다가 후손이 이곳으로 이사하여 7∼8대에 이른다.
Ο 청도(淸道) 김씨
현재 교동면 읍내리, 삼산면 석모리에 살고 있으며, 대사간(大司諫) 난상(鸞祥)이 상용리에 와 살다가 후손이 이곳으로 분산 거주한 지 12∼13대에 이른다.
Ο 나주(羅州) 나씨
교리(校理) 윤보(允寶)가 장정리에 살기 시작하였고 일파는 고능리에 분거하였다. 다른 일파는 역시 고능리에 살며, 고려후기 안렴사(按廉使) 문규(文奎)의 후손 별좌 응주(應周)에서 비롯해 10여대에 이른다. 또한 일파는 신정리에 살고 있다.
그 밖의 일파는 보덕 윤보의 아들 승지존천와(承旨存天窩) 사량(士良)이 하점에서 교동 삼선리로 이주한 뒤, 지금까지 10여대에 이른다.
Ο 의령(宜寧) 남씨
삼산면 송가에 사는 일파는 의령부원군(宜寧府院君) 충경공(忠景公) 구정재(龜亭在)의 후손 만성(萬成)이 광주로부터 들어와 산 지가 7∼8대에 이른다.
Ο 함열(咸悅) 남궁씨
12대 남궁지(南宮止) 이래로 강화에 터를 잡았다.36) 대사성 침(?)의 아들 영(泳)이 처음으로 선행리(수암마을)에 와서 살았는데, 그 자손이 용정·건평·삼동암·덕포 등지에 분거하여 10여대에 이르고 많이 현달하였다.
삼흥리(종강마을)에 사는 일파는 영(泳)의 후손 빈성(彬晟)이 선행리에 들어와 살기 시작한 지 7∼8대에 이르렀다.
Ο 교하(交河) 노씨
창성군(昌城君)파인 노한(盧閑)의 후손은 강화에 세거했다.38) 지금 화도면 문산리에 살며, 이조판서 공필(公弼)의 후손 경진(景鎭)이 이곳에 와 살기 시작하여 7∼8대에 이른다.
Ο 남평(南平) 문씨
교산·삼거·석모 등지에 살며, 강성군(江城君) 익점(益漸)의 후손인 참봉 정욱(廷郁)이 남산 문자촌에 살게 되어 10여대에 이른다.
Ο 여흥(驪興) 민씨
상신(相臣) 몽룡(夢龍)의 후손 사복시정(司僕寺正) 담(曇)이 하일리에 와 산 지가 이미 7∼8대에 이르고, 자손이 능내·도장 등지에 분산 거주하고 있다. 신삼리에 사는 파는 좌랑 광수(光洙)의 후손으로서 10여대에 이른다.
Ο 무안(務安) 박씨
교동면 상룡리에 사는 일파는 예조참의(禮曹參議) 원겸(元謙)의 후손 자번(自蕃)이 이곳에 살기 시작하여 6∼7대에 이른다.
Ο 밀양(密陽) 박씨
일파는 황청리에 살고 있는데 세종 때의 명유(名儒) 흥생(興生)의 후손 세춘(世春)이 병자호란 당시에 서울에서 이곳으로 이주하였다. 다른 일파는 비천군(秘川君) 계후(係后)의 손자인 동돈녕 장녹(長祿)의 후예로 지금 십여 호가 살고 있으며, 다른 한 파는 충남 당진과 김포에 각각 분산 거주하고 있다.
매음리에 사는 일파는 문헌공(文獻公) 연(堧)의 후손 석희(碩熙)가 평산으로부터 이곳으로 이사하였다. 또 한 파는 밀성군 파로 출계하였다. 구하리에 사는 일파는 비천군의 후손 증(增)으로부터, 신문리에 사는 다른 일파는 대제학(大提學) 율(栗)의 후손 주부 명동(命東)부터 이곳에 살았다.
주문에 사는 일파는 사직(司直) 시림(時霖)의 후손 염(얳)이 그 종제 현(玹)과 같이 이곳에 왔으며, 내리에 사는 일파는 부마(駙馬) 갱(죖)의 손자 선령(先齡)이 처음으로 이곳에 와 살았다. 볼음도에 와 사는 파는 밀성군(密城君) 척(陟)의 후손 천경(天慶)의 후손이다.
교동 읍내리에 사는 일파는 평간공(平簡公) 거겸(居謙)의 후손 무과 일흥(一興)이 이곳으로 왔으며 교동 삼선리에 사는 일파는 역시 평간공의 후손 현감 일계(一繼)로부터 살기 시작하였다.
Ο 반남(潘南) 박씨
문순공(文純公) 세채(世采)의 현손 진사 정원(晸源)이 능내리에 들어온 뒤 5∼6대를 살고 있다. 당산리(구 삼간리)에 사는 일파는 세양공(世襄公) 강(薑)의 후손 황(晃)이 서울에서 낙향하여 이곳으로 이주하여 비롯된 자손이다.
Ο 순천(順天) 박씨
삼산면 하리에 사는 일파는 유생 선기(善基)로부터 이곳에 살아 자손이 10여대에 이른다.
Ο 영암(靈岩) 박씨
호조판서 세보(世甫)의 후손 내금장(內禁將) 희길(希吉)이 숭뢰리에 와 살기 시작한 뒤 12∼13대에 이른다. 하도리에 사는 일파는 희길의 동생 현감 국길(國吉)의 자손이 되며 대산리에 사는 일파는 주부 만성(萬星)이 처음 이곳에 거주하기 시작한 뒤 15∼16대에 이른다.
Ο 울산(蔚山) 박씨
건평에 사는 일파는 흥려백(興麗伯) 윤웅(允雄)의 원손 병절교위(秉節校尉) 계성(繼性)이 처음 이곳에 와서 산 뒤 17∼18대에 이르며 화도면 문산·내리 등에 분산 거주하고 있다.
Ο 온양(溫陽) 방씨
판서공파(判書公派) 17대손 방망(方網)의 후손이 19대손 방득정(方得正)·방치정(方致正)의 대 이래 강화에 세거했다.48) 덕포리에 살고 있으며 다른 일파는 길직리에 살고 있는데, 군수 식(軾)이 처음 하도리에 와 살게 된 뒤 자손이 각처로 분산 거주하여 8∼10여대에 이른다.
교동 동산리에 사는 일파는 월봉선생(月峯先生) 지(智)의 후손 승지 강의 손자 치정(致精)이 이곳에 살기 시작하여 14∼15대에 이르렀는데 후손 중 대용리에 사는 파가 가장 번성하다.
Ο 분성(?城) 배씨
삼성리(돌성마을)에 살며, 현감 세적(世績)의 손자 진사 숙(淑)이 처음 칠원으로부터 이곳으로 이사한 뒤 16∼17대에 이르고 있다.
황청리에 사는 일파는 영장(營將) 철중(鐵重)의 손자인 진사 여경(汝慶)·의경(義慶) 형제가 이곳에 살게된 뒤 15∼16대에 이른다.
Ο 서산(瑞山) 송씨
현재 두운리(귀능골)에 살며 관집의호(官執義號) 거(죜)가 연리에 살다가 이곳으로 이사하여 10여대에 이른다.
Ο 여산(礪山) 송씨
외포리(외주)에 사는 파는 좌리공신여성군이판공무공(佐理功臣礪城君吏判恭武公) 문림(文琳)의 후손 진사 희남(希男)이 처음에 양오리에 와 산 뒤 10여대 이르러 이곳과 삼거리·조산 등지에 산재하고 있다.
Ο 진천(鎭川) 송씨
전서공(典書公)파의 후손이 강화에 세거했다.
Ο 고령(高靈) 신씨
교관 필모(弼模)가 하일리에 온 뒤 후손이 장정리와 고능리에 이주하였는데 7∼8대에 이른다.
Ο 평산(平山) 신씨
인산리(별밭)에 사는 파는 한성판윤(漢城判尹) 하(夏)의 후손 맹주(孟舟)가 이곳에 온 후에 퍼진 자손들이며 신현리 및 창후리·신봉리 등지에 사는 일파는 귀달(貴達)의 후손 재현(在顯)이 처음 신현리에 와 살면서 시작되었고 교동 봉소리에 사는 일파는 장절공(壯節公) 숭겸(崇謙)의 후손 천영(天榮)이 이곳에 이르러 10여대에 달하고 있다.
Ο 청송(靑松) 심씨
신삼리에 사는 일파는 충신 장악정(掌樂正) 숙(?)이 이곳으로 낙향해 온 뒤 현재 10여대에 이르고 있다. 삼동암에 사는 파는 진사 여진(汝鎭)이 이곳에 이주한 지 8∼9대에 이른다. 선두리에 사는 파는 청능부원군(靑陵府院君) 익효공(翼孝公) 강(鋼)의 후손 능석(能奭)·능익(能益)·능준(能俊) 등 삼형제가 이곳에 이주하여 자손이 7∼8대에 이른다.
Ο 풍산(豊山) 심씨
지산리에 사는 일파는 청천당(廳天堂) 수경(守慶)의 후손 사과 수의(守毅)가 처음으로 이곳에 와서 산 지가 7∼8대에 이른다.
Ο 강진(康津) 안씨
용정·솔정·당산·지산·오상 각처에 산거하는 안씨는 모두 문성공(文成公) 유(裕)의 후손이며, 선공판사(繕工判事) 충달(忠達)이 용정에 살기 시작한 뒤 그 후손이 각지로 산거하여 17∼18대에 이르렀다.
Ο 광주(廣州) 안씨
24대손 안지(安智) 이래 일부 후손이 강화에 세거했다. 외포리에 살며 사간공(思簡公)의 원손 종도(宗道)가 와 살다가 향교의 변두 소임으로 천거된 바 있다.
Ο 순흥(順興) 안씨
인산리에 사는 일파는 군수 덕창(德昌)이 이곳으로 오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외포리에 사는 일파는 병판 신종(信從)의 후손 선(璿)의 자손들이다. 창후리에 사는 파는 병조판서 문숙공(文肅公)의 후손 충위위(忠衛尉) 희(禧)의 자손들이다.
Ο 흥양(興陽) 오씨
두성군(荳城君) 영노(寧老)의 증손 전랑(銓郞) 수도(守道)가 처음 양사면에 와 살기 시작한 뒤 10여대에 이른다.
Ο 문화(文化) 류씨
길직리에 사는 일파는 참판 봉서(鳳瑞)가 처음으로 창리에 와 거주하다가 후손이 길직리로 이사하여 10여대에 이르렀다. 신정리에 사는 파는 세정(世貞)이, 신당리에 사는 일파는 부사 백손(伯孫)이 이곳에 오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석모리에 사는 파는 상신참의 춘록(春祿)이 처음 동막에 와 살다가 후손인 재훈(在勳)이 이곳으로 이사하여 7∼8대에 이르렀다.
Ο 전주(全州) 류씨
덕포리(오음)에 살며 대제학(大提學) 의손(義孫)의 후손 동몽교관 윤범(潤範)이 이곳에 와 산지가 이미 13∼14대에 이른다.
Ο 진주(晋州) 류씨
덕포리에 살며 응지(應祉)가 이곳에 와 살고 그 후 7∼8대에 이르렀다. 숭뇌성에 사는 파는 통덕랑 진형(震亨)이 이곳에 와 살았는데, 자손이 10여대에 이른다.
선행리 파는 진사 필복(必復)이 처음 선원에 우거하다가 후손들이 장령(현재 옥림리)로 이주하여 살기 시작하였다. 도장리에 사는 일파는 감찰 사주(師周)가 옥림리에서 후손이 이곳으로 이사와서 지금에 이르고 있다.
Ο 강릉(江陵) 유(劉)씨
옥천부원군(玉川府院君) 문희공(文僖公) 창(敞)의 후손이 본군 각지에 살고 있다. 만홍(晩泓)에서 비롯한 일파는 초지에서 후손이 지산리로 이주하여 살고 있으며, 선행리에 사는 파는 국필(國弼)에서 시작되어 온수리에서 이곳으로 이사하였다.
월곶에 사는 파는 문희공의 5대손 실(實)이 문화군에서 이곳으로 이주하였다. 교산리에 사는 파는 기방(起方)에서 비롯되었고 석포리 파는 한실(漢實)이 이곳에 오면서 시작되었고, 냉정리에 사는 일파는 진사 명한(明漢)의 후손이다.
Ο 파평(坡平) 윤씨
파평 윤씨는 8개 파가 있다. 망월리에 사는 일파는 통덕랑 재대(載大)에서 비롯되었다. 인산리(다락말)에 사는 일파는 균(均)이 이곳에 와 살기 시작했고 삼흥리(산문리) 일파는 의성(儀成)이 처음 이곳에 살기 시작한 뒤 10여대에 이른다.
삼흥리(존강마을)에 사는 일파는 군수 봉서(鳳瑞)에서 비롯되었으며, 부내파는 세영(世榮)이 비로소 이곳에 살면서 시작되었다. 또 한 파는 인함(仁涵)의 증손이 송해면 김작골에 와 살기 시작해 지금은 군내 각처에 분산 거주하고 있다.
그 외 일파는 판관 취은(就殷)이 먼저 고성동(월곶리)에 와 살다가 서울로 이사하였고, 그 증손 재준(在儁)이 다시 본도로 돌아와 산 이후 그 자손이 건평·삼흥·사기·길직 등 여러 곳에 산재 거주하여 8∼9대에 이르고 있다.
Ο 경주(慶州) 이씨
진사 예경(禮卿)이 처음 위량(다락말)에 살았는데 그 아들 한성부윤(漢城府尹) 정흠(廷欽)이 망월리로 이주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망월리에 사는 일파는 동중추(同中樞) 창선(昌先)에서 비롯되었다.
Ο 농서(쫿西) 이씨
원래 농서 이씨는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에 원병으로 왔던 명나라 이여송(李如松)장군 동생의 자손이다. 그 후손이 용정리에 와서 산 뒤 오늘에 이르고 있다.
Ο 용인(龍仁) 이씨
시조는 고려 건국시 태조 왕건을 도운 삼한벽상공신삼중대광태사(三韓壁上功臣三重大匡太師)인 길권(吉卷)이다. 헌납공(獻納公)인 효돈(孝敦)의 손자대(21대손, 1550년 전후)부터 불은면 고릉리 아침가리에서 거주하였고, 그 후 후손들(32대손, 1800년 전후) 일파가 길상면 초지리와 강화읍에서 거주하였다. 또 양도면 길정리에 거주하고 있다.
한편 부정공(副正公) 실(實)의 차손자 15대 직계파가 선원면 연리 연동에서 6∼7대에 걸쳐 거주하고 있다. 시향은 음력 10월 1일부터 중시조 부원군(용인군 기흥읍 영덕리)을 시작으로 3일간 용인지역에서 차례로 진행된다.
Ο 전의(全義) 이씨
사마(司馬) 동준(東駿)이 창리에 산 이후 이미 6∼7대에 이르고 또 일파는 역시 창리에 사는데 예빈사별제(禮賓寺別提) 윤신(潤身)의 자손으로 십여대에 이르렀다.
그 밖에 사과(司果) 급(級)이 솔정리에 살기 시작하여 그 후손이 도장리·금월리·갑곶리 등지에 분산 거주하고 있어 이미 십여대를 내려 오고 있다. 신봉리에 사는 일파는 진사 진웅(震雄)의 자손이다.
Ο 전주(全州) 이씨
조선 왕족의 일파로 고양부정(高陽副正) 인(仁)이 임진왜란 때에 강화로 피난와서 살게된 후손으로서 인의 손자 빈수(守)가 교동면 봉소리에 이주하여 그 자손이 또한 10여대 이르고 있다.
지산리에 사는 일파는 역시 효녕대군의 후손인 득경(得景)의 자손이 되며 화도면 덕포리에 사는 일파는 도삼(道三)의 자손이 된다. 사기리에 사는 일파는 경직(景稷)의 후손이 처음 이곳에 거주하게 되었다.
사기리 남촌에는 여양군(呂陽君) 자겸(子謙)의 후손 이춘(二春)이 살았는데, 자손이 10여대에 이른다. 금월리에 사는 일파는 역시 덕천군의 후예로 판관 수일(秀一)이 이곳에 살기 시작하였고, 두운리, 길정리, 석포리에 사는 일파는 광평대군(廣平大君)의 후손인 수리(守理)의 자손이 된다.
교동면 봉소리에 사는 일파는 태산군(泰山君) 봉(鳳)의 후손인 문환(文煥)의 자손이며, 신봉리에 사는 또 다른 일파는 통사랑(通仕郞) 재(梓)가 신봉리로 이사하면서 자손이 퍼지게 된다. 송해면 하도리에 사는 파와 강화읍 용정리에 사는 파는 파능도정(巴陵都正) 희민(希閔)의 자손이 되며, 이강리에 사는 일파는 관국(觀國)의 자손이다.
갑곶리에 사는 파는 부호군(副護軍) 승립(承立)의 자손이다. 양사면 북성리에 사는 일파는 완창대군(完昌大君)의 후손 지만(枝蔓)이 낙향한 후 지금의 45대에 이르렀으며 50여호가 집단 거주하고 있다.72) 전주 이씨는 현재 강화에만 약 470여 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현재 10여개의 파로 분파되어 있으며 시제는 각 파별로 지내게 된다. 임영대군파의 경우 음력 10월 보름에 송해면 하도리에서 지낸다.
Ο 함평(咸平) 이씨
군자감정(軍資監正) 사권(士權)의 현손 만노(萬老)가 도장리에 살게 되었고 일파는 신현리에 살고 있다. 다른 한 파는 강화면 향교골에 들어와 살고 있다.
Ο 기타 이씨
(1) 개성(開城) 이씨
교산리에 살며 참판 사주(師朱)의 후손 통덕랑 필선(弼善)에서 비롯되었고 다른 한파는 석모리에 살고 있다.
(2) 공주(公州) 이씨
어사 명성(明誠)의 후손 세우(世佑)가 처음 내리에 거주하다가 당산리로 이주하여 살고 있다.
(3) 대흥(大興) 이씨
선전관(宣傳官) 윤(潤)이 상도리(호박골)에 와서 살기 시작하였다.
(4) 덕수(德水) 이씨
용재(容齋) 행(荇)의 후손 익진(益鎭)이 대묘동에 살았는데 그 후손이 이강리로 이주하여 살고 있다.
(5) 성주(星州) 이씨
성산군(星山君) 직(稷)의 후손 주열(胄烈)이 냉정리에 살게 되면서 비롯되었다.
(6) 양성(陽城) 이씨
호조참의가 국정동에 살기 시작한 뒤 그 자손이 솔정·상방·덕포 등지에 살고 있다.
(7) 청주(淸酒) 이씨
상당부원군(上堂府院君) 거역(居易)의 후손 정랑 국인(國仁)이 최초에는 문산리에 살다가, 냉정리에 이사한 뒤 10여대에 이른다.
(8) 청해(靑海) 이씨
청흥군(靑興君) 중노(重老)의 현손 연정(衍正)이 창후리에 들어와 살게 되었고 일파는 삼거리에 살고 있다.
(9) 태안(泰安) 이씨
삼산면 상하리에 살며 송곡 문충회(文忠會)의 후손 명암(命岩)때에 처음으로 이곳에 들어왔다.
(10) 한산(韓山) 이씨
판서 욱(稶)부터 삼거리에 살기 시작했다.75)
(11) 합천(陜川) 이씨
22대 이화룡(李化龍)의 대에 병자호란을 당한 이래 강화에 세거했다.
(12) 여주(驪州) 이씨
문순공파(文順公派)인 13대 이능백(李能白)의 후손은 강화에 세거했다.
Ο 나주(羅州) 임(林)씨
오위장(五衛將) 명진(命鎭)이 처음 통진으로부터 강화로 건너온 지 5∼6대에 이르며, 지금은 창후리에 다수가 살고 있다.
Ο 덕수(德水) 장씨
사과 희오(希五)가 처음 장정리에 오면서 비롯되었고 강화읍에 사는 일파는 참판 문취(文就)의 후예이다.
Ο 인동(仁同) 장씨
철산리에 살고 있으며, 봉현(鳳鉉)에서 비롯되었다.
Ο 경주(慶州) 전씨
상벽(尙壁)이 숭뢰리에 살기 시작한 뒤 그 후손 일파가 길직리에 와 산 지가 10여대에 이르고 있다.
Ο 성주(星州)·성산(星山) 전씨
인산리에 살고 있으며, 권농사(勸農使) 신(信)이 처음 이곳에 은거하여 지금은 15∼16대에 이른다.
Ο 안동(安東) 전씨
교동면 봉소리에 사는 일파는 대사헌 사안(思安)이 이곳에 처음 거주하였다.
Ο 옥천(沃川) 전씨
길직리에 살며 호익(浩翼)이 이곳에 처음 거주하였으며 또 다른 일파는 석포리(남섬)에서 살고 있다.
Ο 경주(慶州) 정씨
첨추(僉樞) 양(良)의 손자 군수 사의(思儀)가 처음 오상리에 와 살기 시작하여 이강, 건평, 대산 등지에 살고 있다.
Ο 동래(東萊) 정씨
삼산면 미법도에 사는 일파는 태화(太和)의 후손이 되며 신삼리에 사는 일파는 종사랑(從仕郞) 재(梓)가 처음 선원면 지산리 연동으로 낙향해온 뒤 시작되었다.
Ο 연일(延日) 정씨
옥림리에 사는 군수 염(펥)이 처음 장령에 살 적에 송화현감을 지낸 관계로 사람들이 다 송화댁이라 불렀다. 그 후 10여대를 지나오고 있다.
Ο 하동(河東) 정씨
외포리에 사는 일파는 진사 석형(碩亨)에서 비롯되었고 문산리에 사는 일파는 승남(陞南)에서 비롯되었다.
Ο 나주(羅州) 정(丁)씨
참판 호성의 제3자 은치가 처음 양도면 조산리에 와 산 데서 비롯되었다. 일파는 첨정 옥정의 장남 한방(계절랑)이 문화 유씨와 함께 본도 송해면 돌머리촌에 와 살게 된 뒤 지금은 자손이 각지에 산재하고 있다.
또 한 파는 봉정대부(奉政大夫) 효선(孝善)이 처음 화도면 내리에 살게 된 뒤부터 시작되었으며, 다른 일파는 우상(右相) 응두(應斗)의 증손 언민(彦玟)이 화동면 내리에 이주하면서 시작되었다. 또 일파는 역시 한방(漢旁)이 1512년(중종 7년)에 송해면 솔정리에 살기 시작하여 13대에 이르고 있다.
Ο 백천(白川) 조씨
안방(安邦)이 처음 이강리에 살기 시작한 뒤 후손이 고천·오상·교산·문산·장화·석모리 등 여러 곳에 분산 거주하고 있다. 교산리 ≪조씨가보≫에 의하면, 부흥군의 후예인 좌랑 조(佐郞 祚)가 처음 교산리에 와 살았는데, 자손들이 고천 등지에 분거하였다고 한다.
지산리 파는 통덕랑 득원(得源)이 이곳에 터전을 잡았으며, 교동면 대룡리에 사는 일파는 상의주부(尙衣主簿) 흥벽(興壁)에서 비롯해 오늘에 이른다. 삼산면 상리에 살고 있는 일파는 부흥군의 후예 참판 태상(台祥)이 김천으로부터 이곳에 옮겨와 후손들이 살고 있다.
Ο 함안(咸安) 조씨
10대 조안경(趙安卿)의 후손 일부는 15세 조유장(趙有璋)의 대 이래 강화에 세거했다.87) 금월정(錦月亭) 유장(有璋)이 처음 초지리에 살기 시작하였다.
Ο 신안(新安) 주(朱)씨
득신(得臣)이 처음 장화리에 거주한지 10여 대에 이른다. 또 동막에 사는 일파는 그 선조 충을(忠乙)에서 비롯되었으며, 북성리 파는 생원 수림(秀林)에서 시작되었다. 교동면 난정리에 사는 파는 현감 정(楨)이 처음 이곳에 와 살면서 시작되었다.
Ο 경주(慶州) 최씨
계종(繼宗)이 무과에 급제하여 백령첨사(白翎僉使)로 있다가 본군에 와 살았다. 일파는 옥림리에 살고, 화숙공의 9대손 득숭(得崇)이 대산리에 거주하여 자손이 10여대에 이르며 이강·장정 등지에 분산하여 살고 있다. 일파는 황청리에 살고 있다.
일파는 고능리(아침가리)에서 살고, 역시 화숙공의 후손 지균(智均)이 처음으로 이곳에서 살았으며 자손이 14∼15대에 자못 번창하고 있다.
Ο 해주(海州) 최씨
점우(漸羽)가 고천리에 살기 시작했으며, 다른 일파는 해주 및 도장리, 용정리 등지에 살고 있는데 역시 문헌공 충의 후손이다. 교동면 고구리와 그 밖에 삼산면 상리 항포에 사는 일파는 신강(信剛)이 이 땅에 살기 시작한 뒤 6∼7대에 이르고 있다.
Ο 화순(和順) 최씨
두운리에 사는 일파는 오산군(烏山君) 세기(世基)의 먼 후손이며 판관 대립(大立)이 났던 곳으로서 자손이 10여대에 이른다.
Ο 청주(淸州) 한(韓)씨
창후리에 사는 일파는 부사직(副司直) 절문(節文)이 이곳에 와 살기 시작하여 16∼17대에 이르며 삼성리·양오리·도장리·고능리·신현리 등지에 산거하고 있다. 도장리(속칭 어두니)에 사는 일파는 정랑 정국(定國)에서 비롯되었고, 오상리에 사는 일파는 진사 명대(鳴大)에서 시작되었다.
고천리(검은내)에 사는 일파는 성길파(星吉派)로서 이미 13∼14대에 이르고, 그 중 일파는 금월리에 분거하여 살고 있다. 삼흥·여차·흥왕·삼동암 등지에 사는 일파는 의문(義文)이 처음 별립산 아래에 살았는데, 그 증손 충연(忠連)에 이르러 삼흥리에 이거하고 또 각지로 산거하였다.
동막에 사는 일파는 통정 이현(以賢)의 자손이 되며 봉소리에 사는 일파는 도사(都事) 안국(安國)의 자손으로 10여대에 이른다.
Ο 강릉 함(咸)씨
이강리에 사는 파는 현령 창연(昌淵)이 처음 들어온 뒤 각 리에 산재하여 8∼9대에 이르고, 화도면 흥왕리에 사는 일파는 치림(致林)에서 비롯해 10여대에 이르고 있는데 이들은 모두 동원군(東原君)의 후손이다.
Ο 양천(陽川) 허(許)씨
주(胄)가 처음 당산리에 와 살면서 11∼12대에 이르고 진사 겸(謙) 연리에 터전을 잡아 그 후 12∼13대에 이르며 충정공(忠貞公) 종(琮)의 후손이다.
Ο 남양(南陽) 홍씨
판결사(判決事) 봉조(奉祖)가 기묘사화 때에 부친을 모시고 하점면 신봉리에 와 살기 시작하였고, 봉사(奉事) 흡(?)은 만년에 따로 송해면 하도리 오류천에 와 살게 되었는데 그 자손이 하음으로 이주하여 살고 있다. 또한 삼산면 석모리에 사는 일파는 중호(重湖)가 처음으로 이곳에 와 8∼9대를 살아오고 있다.
Ο 홍주(洪州) 홍씨
황청리와 강화읍에 살고 있으며, 대사헌 강(剛)의 자손으로 10여대에 이른다.
Ο 부여(扶餘) 황씨
조선 인조 때 충순위(忠順衛)를 지낸 득형(得亨)이 본도로 낙향하여 14대에 이르고 있다. 현재 길상면 길직리 일대에 그 자손이 살고 있다.
장수(長水) 황씨
재청(載淸)이 처음 장령(현재 옥림리)으로 낙향한지 10여대에 이르고 그 중 일파가 불은면 삼동암리에 집단 거주하고 있다. 그 밖에 화도면 내리와 양도면 인산리에 분산 거주하고 있다.
Ο 창원(昌原) 황씨
공조판서 형(衡)이 처음 연미정 아래에 살았는데 그 자손이 대묘동·고성동(월곶리) 일대에서 살고 있다. 추포 일파는 장령·길상 두 곳과 여러 군에 산거하고 있으며, 부근리에 사는 일파는 응일(應一)이 처음 불은면에 살다가 이곳으로 이사하여 살고 있다.
인사리에 사는 일파는 군수 의헌(義軒)이 처음 이곳에 왔으며, 고구리에 사는 일파는 감찰 치원(致源)에서 비롯되었다. 고천리에 사는 파는 임진왜란 때 유원(有源)이 이곳에 와 살아 10여대에 이르고 있다.
Ο 평해(平海) 황씨
감찰(監察) 인원(仁元)이 이강리에 처음 와서 산 지가 14∼15대에 이르고 지금은 인화·양오·구하·고천·외포·도장·덕포 등 각처에 분산 거주하고 있다. 또 한 파는 참판 기(畸)가 처음 북문 송학리에 터전을 잡고 살았는데, 후손이 10여대에 이른다. 주로 대산리·도장리·장정리 등지에 분거하고 있다.
Ο 기타 성씨
○ 거제(巨濟) 반(潘)씨
○ 거창(居昌) 신(愼)씨
○ 결성(結城) 석(石)씨
○ 남양(南陽) 서(徐)씨
○ 남원(南原) 양(梁)씨
○ 단양(丹陽) 우(禹)씨
○ 기계(杞溪) 유(兪)씨
○ 무장(茂長) 유(庾)씨
○ 봉화(奉化) 금(琴)씨
○ 성주(星州)·성산(星山) 여(呂)씨
○ 영암(靈岩) 종(鍾)씨
○ 영월(寧越) 신(辛)씨
○ 원주(原州) 변(邊)씨
○ 진주(晋州) 하(河)씨
○ 청주(靑州) 사(史)씨
○ 충주(忠州) 지(池)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