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3월 1일 서울 탑골공원에서 만세시위가 시작되자 강화군 인근의 개성에서는 3월 3일 이후 7일까지, 인천에서는 3월 9일에 각각 만세시위운동이 파급되어 일어났다. 이러한 시위소식은 서울·인천과 인접한 강화에도 전해져 3월 10일경에는 강화 전체에 알려졌다. 강화에서의 본격적인 만세시위운동 계획은 감리교계 인사들을 중심으로 추진되었다. 시위를 주도한 유봉진·황도문·황유부·염성오·장윤백 등이 모두 교계의 지도급 인사들이었다. 이들의 주도 아래 읍내 장날인 3월 18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거사준비에 들어갔다.
3월 11일에는 황유부의 집에서 황도문·염성오 등이 독립선언서와 『국민회보』 등의 문건을 수백 매씩 인쇄하고, 황도문은 18일의 거사를 주민들에게 알리기 위해 「강화 인민에게」라는 전단과 「독립가」를 만들었다. 이와 같은 4종의 항일문건의 배부는 주로 염성오를 통해 이루어졌다.
거사일인 3월 18일 강화 장터에 모인 군중은 활동하기 편하게 발에 감발을 하였다. 군중 사이에는 만세시위 이야기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오후 2시가 되자 유희철·황일남·황윤실 등의 결사대원들이 만세 시위를 선도하였다.
강화 장터는 관청리와 신문리에 걸쳐 형성되어 있었는데, 그 사이에 냇물이 흐르고 돌다리 석교가 있어 결사대원들은 돌다리 부근에서 시위를 주도해 양쪽 장터 군중을 불러모았다. 유희철이 ‘조선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이어서 조상문·장명순·황윤실 등이 역시 독립만세를 연창하였다. 이들은 ‘조선독립’이라 쓴 큰 깃발을 든 유희철을 선두로 신문리 시장을 한바퀴 돌고 관청리 쪽으로 행진하기 시작하였다.
시장 남쪽에서는 조기신이 자신이 만든 태극기 십수매를 군중에게 나누어 주고 종이로 만든 큰 기를 흔들면서 독립만세를 부르기 시작하였다.
권태철과 장상용이 선두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부르자, 군중이 여기에 적극적으로 호응해 모두가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열창하였다.
급히 출동한 일제 군경이 유희철과 조기신·장상용을 체포하였으나 시위 열기를 꺾을 수는 없었다. ‘결사대장’이라고 쓴 태극기를 어깨에 두른 유봉진은 종루에 올라 큰 종을 쳐서 군중을 모았다.
웃장터·아랫장터는 시위군중으로 가득하였고 시위대는 시장에서 향교를 거쳐 군청으로 진출하였다. 향교 앞에서 유봉진과 고익진은 독립의식을 고취하는 연설을 하였다. 시위대는 다시 향교에서 군청으로 진출하였다. 이날 시장에 모인 군중은 1만명에 육박하였으며, 그 가운데 군청 앞시위에 가담한 인원이 5,000~6,000명이었다.
군수 이봉종도 시위대의 협박으로 억지 만세를 부르기도 하였다. 3시간 동안 독립연설회와 시위행진을 벌이던 군중은 오후 5시경 경찰서를 포위하고 억류된 인사들의 석방을 외쳤다.
시위대의 선봉에 선 온수리 청년 이봉석은 칼을 든 채 친일순사의 처단을 공언하고 일부 군중은 경찰서에 난입하려 하는 등 과격 양상을 보였다. 경찰은 시위대의 위세에 굴복하여 유희철·장상용·조기신을 석방하였다. 시위군중들은 밤 8시 30분 경찰서 앞에서 일시 해산하였다가 재차 시장에 모여 늦은 밤까지 만세를 고창한 뒤 자진 해산하였다.
읍내시위를 주도한 유봉진은 그 뒤 마니산에 숨었으나 일본 경찰이 부모를 핍박하자 온수리로 내려와 체포되었다. 독립선언서를 지참하고 귀향해 만세시위를 촉발시킨 황도문은 시위 직후 강화를 탈출, 제물포를 거쳐 강원도 산골에서 3년간 숨어지냈다. 읍내시위로 인해 유봉진 등 모두 45명이 재판에 회부되었고, 그 가운데 33명이 12월 1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또는 태형을 받아 고초를 겪었다.
18일 읍내에서의 대규모 시위소식을 접한 일제는 인천수비대 경찰 10여 명과 서울 용산 주둔군 40명을 강화도로 급파하였다. 현지에 도착한 일제 군경은 19일 오전 9시부터 각 촌락을 샅샅이 수색하며 시위 참가자 63명을 체포하였다. 이들은 길상면 온수리의 천도교구를 수색하고 구덕희를 연행하였다. 그러자 이날 오후 6시 온수리 천도교구에 태극기를 달고 천도교인 등 수백 명의 주민이 과잉탄압에 항의하며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온수리는 유봉진의 거주지일 뿐 아니라 읍내시위 당시 다음 시위장소로 약속된 곳이기도 하였다. 이에 일제 군경은 시위가 인근지역으로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시위대의 해산을 조건으로 구덕희를 석방하였다. 한편 부내면 출신으로 매일신보 기자로 있던 조구원과 고익진의 아들 고제몽은 3월 20일 강화경찰서 경부 이해용과 선박운송 회사를 경영하던 유진식에게 시위운동 탄압을 경고하는 서한과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점포 폐쇄를 요구하는 서한을 각각 발송하였다.
보성고 학생 오영섭도 강화경찰서 순사부장에게 시위탄압을 경고하는 글을 보냈으며, 합일학교교사 구연준을 비롯해 김한영·김영희·조봉암 등은 3월 20일경 『자유민보자유민보』 등 십수 종의 문건을 만들어 강화 주민에게 살포하였다.
강화읍내에서 시작된 시위는 일제 군경의 강력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교동도 방면으로 파급되어 갔다.
조선시대 군사요지였던 교동도에서는 21일부터 수일간에 걸쳐 만세시위가 계속되었다. 21일에는 화개면의 주민 130여 명이 교동 경찰주재소 앞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전개하였으며, 이튿날에도 역시 화개면 주민 100여 명이 3시간에 걸쳐 일경과 대치하며 시위하였다. 이로 인해 강화 본도에서 출동한 일본군에 의해 주민 35명이 체포되었다.
23일에는 시위가 교동도의 전역으로 확산되어 학생과 기독교인 등 100여 명이 교동으로 몰려와 만세시위를 벌였다. 24일에도 주민 100여 명이 교동 읍내에 회집하여 공자묘와 면사무소 및 옛 군아터 앞에서 독립만세를 고창한 후 해산하였다. 26일에는 시위규모가 더욱 확대되어 화개면 주민 150여 명이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27일에는 시위의 불꽃이 다시 읍내로 옮겨갔다. 이날 2,000여 명의 군중이 강화읍에서 만세시위를 하였으며, 시위의 양상도 부내면사무소를 습격하고 면서기를 폭행하는 등 격렬해졌다. 결국 일제 헌병의 발포로 한 명이 부상을 당하기도 하였다. 29일에는 읍내시위의 열기를 이어 부내면 월곶리에서 주민 100여 명이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고조된 시위 열기는 4월로 접어들자 강화군내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4월 1일에는 양도면의 길정리에서 주민이 집결해 독립만세를 외쳤으며, 송해면 양오리에서도 100여 명이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리고 송해면 소재지인 솔정리에서는 성공회의 중심인물인 고성근이 신자들과 촌민을 동원하여 면사무소 뒷산에서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운동을 벌였다. 또 양사면 산이포, 현 철산리에서도 주민 수백 명이 야간에 등불과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를 고창한 후 해산하였다.
4월 2일에는 송해면에서 주민 200여 명이 봉류산에 올라 독립만세를 외쳤으며, 경찰주재소가 있던 양사면 철산리에서도 기독교인과 주민 등 150여 명이 전날에 이어 시위를 계속하였다. 이후 잠잠하던 시위는 4월 7일 삼산면에서 다시 일어났다. 이안득의 주도하에 삼산면 석모리에서 십수 명이 당산 산정에 올라 봉화를 피우고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4월 8일에는 시위가 강화도의 중부지역으로 전파되어 선원면·양도면·삼산면 등지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양도면의 경우 인산리를 비롯한 면내 수개 지역에서 100여 명씩 집결하여 산위에서 횃불을 피우고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선원면에서도 냉정리 등지에서 역시 산상에서 횃불을 피우고 독립만세를 불렀다. 삼산면 석포리에서도 성공회 교회당 뒷산에서 70~80명이 횃불을 피우며 만세시위하였다. 4월 9일 이후에도 13일까지 삼산면·양도면·불은면 등지에서 마을 주민 수십명이 주로 야간을 틈타 소규모의 산발적인 시위를 벌였다.
강화지역 3·1운동은 3월 18일 읍내 장터의 대규모 시위 이후 4월 중순까지 거의 한 달간에 걸쳐 강화 군내 전역에서 면·리 단위로 전개되었다. 강화읍내 시위는 경남 진주의 경우와 더불어 규모 면에서 전국에서 수위를 다툴 만큼 대단히 컸다. 그리고 감리교와 성공회 등의 교회 신자들이 강화군 전역에서 일어난 만세시위운동을 주도한 대표적인 세력이었다는 점도 강화군 만세시위의 특징적인 양상으로 들 수 있다.
[출처] 제19권 국내 3·1운동Ⅰ – 중부·북부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