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의 비명(碑銘)

적석사사적비

강화지역의 비명은 고려이후부터 대한제국기까지 강화역사를 대변해주고 있다. 강화는 외세의 침략에 대한 항쟁과 국가방어의 최선봉 지역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문 자체도 국난극복과 관련된 무수한 금석문들이 지금까지 남아 있으며, 조선시대 관리들의 선정비나 활발한 저습지 간척의 사정을 알려주는 비가 많다.

강화에는 현재 문화재로 지정된 비가 10기, 비지정 비가 135기 등 총 140여 기가 있다. 그 종류는 대개 선정비류(善政碑類)·기적비류(紀蹟碑類)·묘비(墓碑)와 신도비(神道碑)로 구분할 수 있다. 선정비류로는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유혜비(遺惠碑) 등이 있고, 기적비류는 기적비(紀績碑)·사적비(事蹟碑)·기사비(記事碑) 등이 있다.
문화재로 지정된 비는 김상용순의비, 이규보묘갈, 참성단중수비, 황형신도비,해문방수비,쌍충비,석주권필유허비, 적석사 사적비 등이다.


Ο 김상용 순절비

  • 지정번호 : 기념물 제35호
  • 소재지 : (23031)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강화대로 416 (관청리, )

조선 인조 때의 문신인 김상용 선생의 충의를 추모하고 기리기 위해 세워놓은 비이다. 김상용(1561∼1637) 선생의 자는 경택(景擇), 호는 선원(仙源)으로 도승지·대사헌·형조판서·우의정을 역임하였다.

비문의 내용은 병자호란 때 김상용 선생이 왕실의 종묘와 빈궁·원손을 수행하여 강화로 피난 온 이후 강화를 수비하던 지휘부의 안일한 전투 준비에 대한 지적과, 강화성이 청에 의해 함락되고 김상용 선생이 손자와 함께 남문 화약고에 불을 지르고 순절하기까지의 과정이 기록되어 있다.

비각 안에는 두 개의 비가 나란히 세워져 있는데, 하나는 김상용의 증손인 김창협(金昌協)이 글을 짓고 김창집(金昌集)이 글씨를 써서 1700년(숙종 2)에 세운 것이고, 다른 하나는 원래의 비문이 마모되어 1817년(순조 17)에 다시 세운 것이다. 구비와 신비의 내용은 차이가 없으나 후에 세운 비에는 새로 비를 세우게 된 연유와 년도, 친자와 서자의 이름이 첨부되었다.

신비를 세우면서 구비는 땅에 묻었었는데, 1976년 신비를 현재의 자리로 옮기던 중 파묻혔던 구비가 발견되어 두 비를 함께 세운 것이다.


Ο 황형신도비(黃衡神道碑)

향토유적 제6호

황형신도비는 전체높이가 232cm, 비신의 높이가 200cm, 폭이 82cm이며, 두께가 23cm이다. 비문은 그의 현손 윤방이 짓고, 윤제(尹祭)가 글을 썼으며, 김상용이 전을 했다.

황형은 자가 언편(彦平), 본관은 창원(昌原), 선공감정(繕工監正) 황예헌(黃禮軒)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글을 읽어 대의를 통하였고, 활쏘기에도 능해 문무를 겸비했다. 1480년(성종 11)에 무과와 진현시(進賢試)에 급제하고 상서원판관(尙瑞院判官)이 되어 내승(內乘)을 겸하였고, 1486년에 무과중시에 장원하여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올라 유원(柔遠)과 혜산진 첨절제사(僉節制使)에 특진하였다.

그후 황형은 함경북도와 경상좌도 병마절도사를 거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역임했으며, 삼포왜란 때는 방어사로 활약했다.

그 후에도 변방의 오랑캐들의 난리를 진압하는데 많은 공을 세웠으며, 공조판서에 제수되었지만 반대하는 사람들 때문에 포기해야 했다. 그는 풍체가 당당하고 엄연한 기상이 있어 명나라 사신 왕헌신(王憲臣)이 한번 보고 감탄하여 주머니 속에 있던 약물을 신표로 주어 이후에는 중국사람들도 그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Ο 쌍충비(雙忠碑)

• 향토유적 제10호

쌍충비는 불은면 덕성리 산12번지에 자리잡고 있으며 현재 향토유적 제10호로 지정되어 있다. 광성보 경내에 2기가 있다. 1871년 신미양요 때 광성보전투에서 순절한 중군 어재연 외 59명의 순절비이다.

1기는 강화군민이 건립한 <광성파수순절비(廣城把守殉節碑)>로 비의 규모는 폭 62cm, 높이 168cm, 두께 25cm의 양면비로 1873년에 건립한 것이다.

다른 1기는 어재연과 어재순순절비인데 폭이 58cm, 높이 177cm, 두께 26.5cm의 양면비로 역시 1873년에 건립했다. 고종 때부터 제사를 지내왔으며, 1970년부터는 어재연의 후손인 어윤원이 제형을 올려 충절의 유업을 추모하고 있다.


Ο 경고비 (해문방수비/海門防守碑)

향토유적 제9호

해문방수비는 불은면 덕성리 836번지 덕진진 경내에 1기가 있다.  1867년에 대원군의 명으로 강화 덕진 첨사가 건립한 것으로 경고비(警告碑)라고도 부른다. 비의 규모는 높이가 147cm, 폭이 54.5cm, 두께가 28cm의 단면비이다.

비면에는 “해문방수타국선신물과(海門防守他國船愼勿過)”라고 새겨져 있는데 당시 쇄국정책의 일면을 살펴 볼 수 있다.


Ο 석주권필유허비(石洲權先生遺墟碑)

향토유적 제27호

석주 권필(1569 – 1612) 선생은 조선 중기의 탁월한 시인으로서 한때 강화에 많은 유생들을 가르치며 시화를 나눈 인연을 갖고 있다. 선생의 자는 여장, 호는 석주, 본관은 안동, 벽의 아들이다. 과거에 뜻이 없어 시주로 낙을 삼고 가난하게 살다가 문신들의 추천으로 동몽교관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선조 25년 (1592)임진왜란때는 강경한 주전론을 주장했고, 광해군 초 권신 이이첨이 교제를 청했으나 끝내 거절했다. 광해군의 비 유씨 척족들의 방종을 궁유시로 풍자했다고 하여 광해군 4년(1612)친국을 받은 뒤 유배되었다.

귀양길에 올라 동대문 밖에 이르렀을 때 친구들이 주는 술을 폭음하고 이튿날 별세했다. 인조반정 후 사헌부지평에 추증되었고, 유고로는 「석주집」을 남겼다. 유허비는 대리석으로 그 전면에 「석주권생유허비」라고 새겨져 있다.


Ο 참성단중수비

문화재자료13호

참성단을 새로이 보수한 후 그 내용을 기록해 놓은 것으로, 가파른 바위 윗면을 손질하여 그 위에 비문을 새겼다. 마니산 꼭대기에 자리잡은 참성단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조선 숙종 때 강화유수를 지내던 최석항(崔錫恒, 1654~1724)이 관내를 순찰하며 마니산에 올랐다가 이곳이 무너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당시 전등사 총섭이었던 승려 신묵에게 명하여 새로이 고쳐 짓도록 하였다.

최석항은 ‘참성단은 단군이 돌을 쌓아 단을 만들어 하늘에 제사하던 곳’이라며 ‘수천 년이 지나도록 후손들이 우러러보며 공경할 곳이니 고쳐서 완전하게 하는 일을 어찌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적었다. 비는 조선 숙종 43년(1717) 5월에 마련해 놓은 것으로, 비문에는 ‘참성단’이라는 이름을 붙인 사연, 참성단에 대한 선조들의 뜻 등에 관한 기록들이 함께 적혀 있다.


Ο 양헌수 승전비

기념물 제36호

 

 

 

 

 

 

 

 

 

이 비는 양헌수 장군이 병인양요 때 정족산성에서 프랑스군을 물리친 공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이다. 강화군민들이 1873년(고종 10)에 세운 것으로 정족산성 동문 가까이 있다.

화강암으로 건립된 비의 총 높이는 181cm, 비신(碑身)의 높이는 163cm, 폭은 60cm, 두께는 27cm이며 단층 1칸의 비각 내에 안치되어 있다. 비 앞면에는 ‘순무천총양공헌수승전비(巡撫千摠梁公憲洙勝戰碑)’라고 음각되어 있고, 비 뒷면에는 장군의 공적이 수록되어 있다. 양헌수(1816~1888)는 1848년(헌종 14)에 무과에 급제하였다. 1865년(고종 2)에는 제주목사로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었다.

1866년(고종 3)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강화도 탈환의 임무를 맡아 50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강화 정족산성으로 들어가, 그곳으로 쳐들어오는 프랑스군을 격퇴하였다. 화력이 절대적으로 열세임에도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양헌수의 뛰어난 전략 때문이기도 하다.

정족산성 전투 패배로 사기를 잃은 프랑스군은 곧바로 강화도에서 철수하게 된다.


Ο 민진원공덕비(閔鎭遠功德碑)

민진원공덕비는 현재 화도면 사기리에 세워져 있는데 비의 규모는 전체높이가 122cm, 비신의 높이가 98cm, 폭이 41cm, 두께가 28cm로 건립시기는 1863년(철종 14)이다. 비의 앞면에는 “행유수민공진원적덕휼민영세불망비공륜상세민유적표(行留守閔公鎭遠積德恤民永世不忘碑公輪常稅民有積票)”라고 새겨져 있어 민진원의 공덕을 기리고 있다.

이 비는 1706년 강화유수로 있을 때 그의 치적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것이다. 그는 세금을 삭감해주고, 선두포 둑을 쌓는 등 짧은 시간에 많은 치적을 남겨 칭송을 받았다고 한다.

또한 민진원에 관한 비는 강화읍 신문리에 유수민진원영세불망비(留守閔鎭遠永世不忘碑)가 전하고 있다. 이 비의 규모는 전체 높이가 151cm, 폭이 63.5cm, 두께가 27cm로 그의 유수 재임중 업적을 기린 선정비다.

 


Ο 유수이공용희중수문묘기적비(留守李公容熙重修文廟紀績碑)

유수이용희중수문묘기적비는 현재 강화읍 관청리에 세워져 있는데, 비의 규모는 전체높이가 158cm, 폭이 45cm, 두께가 22cm로 1870년에 제작되었다. 이 비는 이용희가 퇴락한 강화의 문묘를 중수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예컨대 “두 번이나 중수한 문묘가 세월이 오래되고 비바람에 씻겨 기와와 서까래의 중수한 것이 눌리고 뒤집어졌으며, 계단도 이미 기울어져 개건(改建)을 도모했지만 의논조차 하지 못한 실정”이라고 적고 있다.

이용희가 강화유수로 부임하여 3개월의 공사기간을 거쳐 문묘를 보수해 놓으니 “몇 길의 담장과 삼문(三門)의 사표(師表)가 혁혁하게 사람들의 이목을 비쳤다.”고 했다. 이용희는 조선후기의 무신으로 자는 공습(公習), 호는 기원(淇園)이다.

이용희는 1876년 강화도조약체결 당시에는 김병학(金炳學)·홍순목(洪淳穆)·양헌수 등과 함께 조정에서 개국을 반대하는 보수적 쇄국척화론을 고수하기도 했다. 이 비는 1869년 그가 진무사로 강화에 있을 때 문묘를 중수한 공적을 기려 유생들이 세운 것이다.


Ο  정제두신도표(鄭齊斗神道表)

정제두신도표는 현재 양도면 하일리에 세워져 있는데 규모는 전체높이가 177cm, 비신의 높이가 137cm, 폭이 80cm, 두께가 16cm로 1803년(순조 3)에 제작되었다. 내용은 그의 학업과 생애, 덕을 기리고 있다.

정제두는 정몽주(鄭夢周)의 11세손으로 자는 사앙(士仰), 호는 하곡, 본관은 영일이며 서울출생이다. 그가 1736년(영조 12) 88세의 일기로 죽자 그의 시신은 강화부의 그가 살던 집 뒤 하현(霞峴)의 언덕에 묻혔다.

그는 처음에는 주자학을 공부했으나 이론에만 치우친 주자학에 반기를 들고 20여 세때부터 지식과 행동의 통일을 주장하는 양명학에 심취하였다. 그의 양명학 연구는 당시 학계에서 이단시 당하면서도 끝까지 이를 연구 발전시켜 우리나라 최초로 양명학의 사상적 체계를 완성했다. 그는 박식함이나 영화로움을 남에게 들어내 보이려고 하지 않았으며 세자의 사부로 자신을 높이려 하지 않았다.


Ο 적석사사적비(積石寺事蹟碑)

적석사사적비는 현재 내가면 고천리 적석사 옆에 세워져 있다. 규모는 전체높이가 394cm, 비신의 높이가 304cm, 폭이 69cm, 두께가 29cm로 1714년에 제작되어 세운 것이다.

재질은 화강암이며 3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앞면에는 고려산적석사지비(高麗山積石寺之碑)가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불공원납기(佛供願納記)로 적석사에서 매년 죽은 혼백을 위로하고 축원한 사실을 적고 있다. 또한 단월(檀越)들의 명단과 시주물의 내용까지도 상세하게 정리했다. 글은 윤순(尹淳)이 썼다.
비의 내용은 적석사의 창건과 중수 등 사적을 기록해 놓았다.

적석사는 천축조사(天竺祖師)가 창건한 이후 고려시대부터 알려진 듯하다. 몽골의 침입과 무인정권의 강화천도, 그리고 조선시대에 들어와 병자호란이라는 혼란기에서도 적석사는 큰 피해를 입지않고 그 명맥을 유지한 것이다. 병자호란 때는 오랑캐마저도 적석사에 오면 반드시 머리숙여 예배하고 스님을 공경했다고 한다.

적석사는 비문에 의하면 조선시대에 들어와 1554년(중종 39)과 1574년(선조 7)에 중수한 사실이 보이고, 1634년(인조 12)에는 비구 계현(戒玄)·삼창(三昌) 등이 또 다시 중수하여 새롭게 만들었다고 한다. 이 후에도 누각을 새로 짓고, 향로암을 중수했다.
비문 이 외에도 석가의 가르침과 불교의 중국과 한국전래를 수록하고 있고, 비면은 풍화로 심하게 마모되어 있다.


Ο 하음백봉우유적비(河陰伯奉佑遺蹟碑)

하음백봉우유적비는 현재 하점면 부근리 420-2번지의 논 가운데에 세워져 있다. 규모는 전체높이가 121cm, 폭이 57cm, 두께가 29cm로 1775년(영조 51)에 제작된 것이다.

이 비는 고려시대 하음 봉씨의 시조인 봉우가 연못에서 석함에 담겨 떠올랐다는 전설을 기록하고 있다. 고려 1106년(예종 1) 하음에 사는 한 할머니가 큰 연못가에서 물을 긷고 있었는데 상서로운 기운과 함께 석함(石函) 하나가 물위로 떠올랐다. 할머니가 함을 열어보니 그 안에 사내아이가 들어 있는데 그 자태가 단정하고 아름다워 왕에게 바쳤다. 왕은 아이를 궁중에서 기르면서 이름을 봉우라고 지었다.

봉우는 장성하여 갑과에 합격하여 벼슬이 위위소경(衛尉少卿)와 정당문학좌복야(政堂文學左僕射)에 이르고 하음백에 봉해졌다고 한다. 이 비는 봉우가 떠오른 연못옆에 세워졌는데 그 연못을 봉가지(奉哥池)라고 한다. 봉가지라는 이름은 봉우의 후손인 봉천우가 이 연못 근처에 거주하면서 ‘봉가지’라 칭한 뒤부터였다고 한다. 연못은 현재 흙으로 약 1m 정도의 뚝을 쌓고 가로 13.7m, 세로 9.4m의 시멘트곽으로 만들어졌으며, 수면으로부터의 높이는 약 65cm이다.

한편 봉씨에 얽힌 다른 유적으로는 봉천대와 5층석탑 및 석상각(石像閣) 등이 있다. 봉천대는 봉우의 5대손인 봉천우가 선조의 발상지에 제단을 쌓아 올린 것이다. 현재는 하점면 신봉리 산64번지 봉천산 꼭대기에에 자리잡고 있는데, 면적 7.2㎡, 높이 5.5m의 정방형 사다리꼴 모양으로 쌓은 화강암 석축단이다.

이 제단은 옛부터 봉씨들이 모여 조상을 기리고, 국태민안을 위해 제사를 지냈다고 하며, 조선시대에는 봉수대로 사용되었으며, 현재는 원형 그대로 보존된 채 인천광역시 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5층석탑은 봉우가 자기를 처음 발견하여 왕에게 천거한 할머니의 은공에 보답하기 위하여 봉은사라는 절을 짓고 쌓은 석탑이라 전해오고, 석상각 또한 봉우가 할머니의 화상을 안치하고 제사를 지낸 사당으로 전해오지만 당시의 기록으로 고증되지는 않는다.


Ο 강화충렬사비(江華忠烈祠碑)

강화충렬사비는 병자호란 때 충신 김상용 외 27위의 신위를 봉안한 충렬사에 세워진 비로 1701년에 규모는 전체높이가 245cm, 폭이 80cm, 두께가 28cm로 비의 앞면에는 강화충렬사비기 숭정갑신후오십팔년(江華忠烈祠碑記 崇禎甲申後五十八年)이라고 새겨져 있다.

비는 병자호란 때 강화를 지키다 순절한 인물들의 공적을 수록하고 있다. 먼저 김상용은 오랑캐가 강화로 침입하자 남성 문루에 올라 유황을 쌓아놓고 자결했고, 원임 공조판서 이상길(李尙吉)은 침입사실을 듣고 통곡하면서 종묘의 신주를 거두고 순절하였으며, 원임 돈령부도정 심현은 집사람들이 배를 마련해 놓고 피신하기를 원했지만, 왕에게 상소하는 글을 쓴 뒤에 부부가 함께 죽었다고 한다.

또한 원임 사헌부장령 이시직(李時稷)은 유언을 남기고 사복시주부 이시영(李時榮)과 함께 관과 구덩이를 파고 목매어 자결했다. 시강원필선(侍講院弼善) 윤전(尹孺)은 적을 꾸짖고 굴하지 않다가 죽음을 당했으며, 원임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권순장과 성균관생원 김익겸은 김상용이 자결할 때 함께 죽었다.

본부 중군 황선신(黃善身)과 천총 강흥업(姜興業)은 군사를 이끌고 강나루를 끊으려고 싸우다 죽었고, 천총 구원일은 강안에 올라가 적의 침입에 소극적으로 대처한 김경징 등을 꾸짖다가 분을 못참아 물에 몸을 던졌다고 한다. 이들은 난리가 끝나고 김상용이 어렸을 때 살았던 선원촌에 사우를 세웠으니 이것이 충렬사라 하였다.

< 출처 : 신편강화사 / 사진 : 강화로닷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