Ο 이규보 묘
- 지정번호 : 기념물 제15호
- 소재지 : (23048)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까치골길 72-17 (길직리
고려의 문신이자 문장가인 백운거사(白雲居士) 이규보(1168∼1241) 선생의 무덤이다. 고려의 무신정권 하에서 태어나 무신정권에 적극 협력했던 문인의 한 사람으로, 1191년(명종 19)에 진사시에 합격한 후 최충헌(崔忠獻)에게 발탁되어,
여러 관직을 거쳐 문하시랑평장사에 올랐다. 『동국이상국집 (東國李相國集)』에 실려 있는 「동명왕편」을 비롯한 2천여 수의 시와 산문은 대다수의 작품들이 문학적,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으며, 특히 「동명왕편」은 초기 고구려사 연구와 우리 민족의 자주 의식을 고취시키는데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자료로 높이 평가 받고 있다.
또한 몽골군의 침입으로 강화도로 천도해서 대장경을 만들 때 민족수호의 충정이 담긴 「대장경각판군신기고문(大藏經刻板君臣祈告文)」을 지었다. 현재 묘역에는 상석과 장명등(長明燈:무덤앞에 세우는 돌로 만든 등)이 있으며, 좌우에는 문인석·무인석·망주석과 석양(石羊) 한 쌍씩이 세워져 있다. 봉분 하단은 둘레돌이 둘러쳐 있으며 1967년 후손들이 묘역을 정화하고, 묘역의 오른편에 재실(齋室)과 왼편의 유영각(遺影閣)을 복원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묘 주변의 석물 중 문무석은 매우 고졸하여 당시 유풍을 알 수 있는 귀한 조각이며, 석양은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는 고려시대의 조각으로 평가되고 있다.
Ο 허유전 묘
- 지정번호 : 기념물 제26호
- 소재지 : (23046)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 강화동로549번길 88 (두운리
고려 후기 충숙왕 때의 명신 허유전의 묘이다. 허유전은 1243년(고종 30) 출생했으며, 1274년 원종때 과거 문과에 급제하였다. 1309년(충렬왕 34) 전라도안찰사를 거쳐, 밀직사사에 올라 지공거(과거시험을 주관하는 관직)가 되어 여러 인물을 선발하는 일을 맡았다.
충숙왕 때 정승의 자리에 올랐으며 1323년(충숙왕 10) 81세의 나이에 원나라에 귀양 가 있던 충선왕을 고려로 모셔오기 위해 원나라로 갔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왔다. 묘는 도굴된 상태로 방치되었다가 1985년 후손 허관구(許官九)에 의해 세상에 알려졌다.
1988년 발굴 과정에서 고려청자 잔 여러 조각, 고려 토기조각 수십 점, 얇은 청동 조각 여러 점, 나무관에 사용한 쇠못 한 점, 11∼12세기에 만들어진 중국 송·금대의 엽전 19개가 나왔으며, 유골인 엉치뼈도 출토되었다. 이 외에도 많은 부장품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도굴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Ο 이건창 묘
- 지정번호 : 기념물 제29호
- 소재지 : (23056) 인천 강화군 양도면 건평리 655-27번지
조선 후기의 문신이며 대문장가였던 영재 이건창(1852∼1898)의 묘소이다. 묘는 단분(單墳)이며 특별한 장식이나 석조물이 없다. 이건창은 어렸을 때부터 강화학파의 학맥을 계승한 이시원으로부터 양명학을 바탕으로 한 충의(忠義)와 문학(文學)을 배웠다.
5살 때 문장을 구사할 만큼 재주가 뛰어나 신동이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1866년(고종 4) 병인양요가 일어나던 해 15세의 어린 나이로 문과에 급제하였고, 1874년(고종 11)에는 사신을 수행하여 기록을 맡았던 서장관에 발탁되었다. 그 후 충청도·전라도·경상도·황해도의 암행어사로 파견되어 관리들의 비행을 파헤치고 민생구휼을 위해 노력하였다.
1894년 갑오개혁 이후로는 모든 관직을 사양하고 고향인 강화에 내려와 살다가 47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건창의 성품은 매우 곧아 병인양요 때에 순절한 할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었으며, 문필은 송대(宋代)의 문장가인 증공(曾鞏)·왕안석(王安石)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리고 정제두(鄭齊斗)가 양명학(陽明學)의 지행합일(知行合一)의 학풍을 세운 이른바 강화학파(江華學派)의 학문태도를 실천하였다. 한말의 대문장가인 김택영이 뽑은 여한구대가(麗韓九大家)에 포함 될 정도로 문장에 특출하였다. 저서로는 『명미당집(明美堂集)』·『당의통략』 등이 있다.
Ο 정제두 묘
- 지정번호 : 기념물 제56호
- 소재지 : (23057) 인천 강화군 양도면 하일리 산 65
조선 후기 학자이자 강화학의 태두인 정제두(1649~1736)의 묘이다. 정제두의 본관은 영일(迎日), 자는 사앙(士仰), 호는 하곡(霞谷)이며,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정몽주의 후손으로 우의정 유성(維城)의 손자이고, 진사 상징(尙徵)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한산 이씨로 호조판서 기조(基祚)의 딸이다. 서울에서 출생하여 24세에 과거 공부를 그만 두고 양명학 연구에만 전념하였다.
61세에 선조들의 무덤이 있는 강화군 양도면 하일리 하곡(霞谷) 마을로 옮겨와 살았다. 아들 후일(厚一)을 비롯하여 이광명(李匡明), 신대우(申大羽), 심육(沈?), 윤순(尹淳), 이광사(李匡師) 등이 그의 문인으로 학풍을 이었다. 그가 속한 소론의 가학으로서 학파를 형성하여 강화도를 중심으로 계승되어 강화학파라 불리게 되었다. 양명학을 중심으로 한 강화학파는 정제두를 시작으로 한말 이건창, 이건승을 이어 박은식과 정인보에게로 그 학통이 계승되었다.
묘역은 강화군 양도면 하일리 62-5 길 바로 옆에 있다. 아버지 상징 묘역 바로 뒤편 위에 있다. 묘역은 완만한 경사지에 사성이 없이 용미만이 길게 되어 있고, 그 앞에 원형봉분이 있다. 봉분 앞에는 혼유석, 상석, 향로석이 있다. 하계부분에는 좌우에 민무늬로 된 상단에 띠를 2개 두른 망주석과 금관조복에 양관을 한 문인석이 있다.
Ο 황형 묘
- 지정번호 : 기념물 제65호
- 소재지 : (23021) 인천 강화군 강화읍 월곳리 산72-1
조선 세종 때의 명장 황형 장군의 묘이다. 황형 장군(1459∼1520)은 1480년(성종 11) 무과에 급제하여 무관으로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중종 때 첨지중추부사가 되었다가 1510년(중종 5) 삼포왜란이 일어나자 방어사가 되어 제포(薺浦)에서 왜적을 크게 무찌르고 그 공을 인정받아 경상도병마절도사가 되었다.
그 뒤 평안도·함경북도의 병마절도사를 거쳐, 공조판서에 이르렀다. 시호는 장무(莊武)이다. 묘역은 강화읍 월곶리 야산에 있다. 묘역은 상계와 하계로 나누어져 있는데, 상계에는 곡장이 없이 원형 봉분이 조성되어 있고 부부의 묘가 좌·위에 있는 쌍분이다.
봉분 우측에 화강암으로 만든 묘표가 있은데 장방형 대석에 화관석 비두를 갖추고 있다. 봉분 앞에는 상석과 팔작지붕 형태의 장명등, 한 쌍의 망주석과 문인석이 배치되어 있다. 묘역의 오른편 산 아래에는 신도비와 황형장군의 위패를 모신 장무사(莊武祠)가 있다.
Ο 김취려 묘
- 지정번호 : 문화재자료 제25호
- 소재지 : (23057) 인천 강화군 양도면 하일리 산71
고려 후기의 장군 김취려의 묘이다. 그는 고려 후기 예부시랑을 지낸 김부(金富)의 아들로 본관은 언양이며, 음서(蔭敍)를 통해서 정위(正尉)에 임명되었다. 그후 1219년에는 몽골군과 동진국과 힘을 합쳐 강동성에 웅거한 거란군을 격퇴하는 전과를 올렸으며, 1232년에는 문하시랑평장사에 올랐다. 사람됨이 정직하고 검소하였으며, 아랫사람을 바르게 다스려 누구도 그를 속이지 못하였다고 한다.
고종 21년(1234) 강화에서 사망하였다. 김취려 묘지석에는 ‘공은 갑오년(고종 21, 1234) 2월 14일에 미미한 병세를 보이다가 21일에 갑자기 돌아가시니 향년 63세이다. 천자(天子)께서는 몹시 슬퍼하며 조문하고 부의를 내리셨다. 공은 복야(僕射) 조언통(趙彦通)의 따님을 부인으로 맞아들여 세 아들과 딸 하나를 두시고 뒷일을 처리하게 하였다.
7월 12일에 진강산(鎭江山) 대곡동(大谷洞) 서쪽 기슭에 예장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어 묘지석이 발견된 곳에 강화군과 언양김씨 종친회에서 묘소를 새롭게 정비하였다. 묘역에는 원형의 봉분 앞에 망주석 한 쌍과 상석이 갖추어져 있으며, 하단 부분에 묘역을 정비하고 종친회에서 건립한 비석이 세워져 있다.
< 출처 : 강화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