Ο 고려궁지
고려가 1232년 몽골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강화로 수도를 옮고 각도의 민정을 징발하여 관아와 궁궐을 완성했다. 이 궁지는 그후 39년 동안 고려의 수도와 궁궐의 역할을 했다. 더욱이 1251년에는 국자감이 설치되었고, 1255년에는 태묘가 세워져, 그 규모에 있어서는 개경에는 미치지 못하였지만 점차 수도다운 위엄과 시설이 갖춰지게 되었다. 이때 내성·외성·중성 및 연안의 제방 등 방비시설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1270년 몽골과 화의가 성립되어 개성으로 환도한 뒤에는 대부분이 무너지거나 불타버렸다. 그후 고려궁지는 조선시대인 1631년에 행궁이 건립되었는데 1714년 강화유수였던 김진규가 행궁이라고 현판을 걸었다. 그밖에 전각과 강화유수부 외규장각 등이 세워졌다.
이후 조선시대에 건립된 대부분의 궁궐과 전각은 병자호란과 병인양요 등의 전란으로 허물어지거나 불타버리고 현재는 동헌과 이방청만 남아 있다. 또한 고려시대의 흔적은 기와편이 축대에 묻혀있을 뿐 그때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유물은 보이지 않는다.
TIP 강화현 읍치의 위치?
개경 환도 이후 강화현의 읍치는 어디에 위치하고 있었을까? 이 문제는 고려궁터 및 조선전기 강화부의 위치와도 얽혀있는 문제이다.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 먼저 고려궁터의 위치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고려궁터의 위치는 현재 사적 133호로 지정되어 있는 강화읍 관청리의 ‘고려궁지’로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고려궁터의 위치 비정문제는 아직 해결해야 할 과제로 남아 있다.
≪고려사≫를 비롯하여 조선시대에 작성된 지리지류에는 고려궁터가 강화부의 동쪽 10리 정도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특히 조선후기의 기록에서는 지금 강화읍의 동쪽인 옥림리·월곶리 일대를 고려궁터로 보고 있다.
그렇지만 고려산·송악산·견자산·남산 등으로 둘러싸인 지형상의 조건과 도성과의 관계, 개경 만월대의 위치 등을 고려해 볼 때, 현재 강화읍 관청리 일대가 고려궁터라는 선학들의 의견은 부인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또한 부의 동쪽에서 10리 떨어진 송악리에 옛 궁터가 있다는 ≪고려사≫의 기록과 옛 궁터는 송악리에 있는데 거리는 부로부터 동쪽으로 10리라고 한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은 조선전기 강화부의 위치가 현 강화읍에서 서쪽으로 10리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였다는 추론을 가능하게 한다. 그리고 이 경우 그 위치는 고려산 남쪽의 내가면 고천리 고비마을로 여기는 의견도 있다.
≪고려사≫에는 1232년 강화현이 강도로 승격되었다고 되어있어 강도시절에는 따로 강화현이 없었고, 강화현은 1270년 개경환도 과정에서 현 강화읍의 서쪽으로 옮겨갔을 것으로 추론된다. 당시 강화도성이 파괴되었으며 강화읍 관청리지역은 고려의 궁궐이 있던 곳이라 명분상 강화현의 읍치가 들어서지 못하였을 가능성이 더 크기 때문이다. < 출처 : 신편강화사 >
Ο 강화유수부 동현
• 시도유형문화재 제25호
동헌은 조선시대 지방관아의 정무가 행해지던 중심건물이다. 관찰사·병사·수사·수령들의 정청(政廳)으로서 지방의 일반행정업무와 재판 등이 이곳에서 행해졌다. 동헌은 대체로 서쪽에 위치한 지방관의 생활처소인 내아(內衙)와 구분되어 보통 그 동편에 위치했기 때문에 동헌이라고 하였다.
강화유수부의 동헌은 강화읍 관청리에 있는 조선시대 관아건물로 고려 고종 때 임시수도로 궁궐이 있던 곳이었는데, 조선시대에 들어와 그 자리에 유수부의 동헌을 지었던 것이다.
최초의 건물은 남아 있지 않고 현재의 건물은 1638년 유수 김신국이 개수하고, 1977년 강화중요국방유적 복원정화사업의 일환으로 개수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Ο 강화유수부 이방청
• 시도유형문화재 제26호
강화유수부 안에 있는 6방 가운데 하나인 이방청으로 조선중기에 세워졌다. 이곳에서는 법전과 군사적인 업무를 제외한 모든 크고 작은 사무를 주관하였다. 1654년 유수 정세규가 건립하여 관아로 사용한 것이다. 그후 1783년에는 유수 김노진이 내부를 개수하고 당호를 주홀당(柱笏堂)이라고 하였다.
건물은 이후 여러 차례 개수를 거쳐 원형을 찾아볼 수 없지만, 그 양식은 조선시대 지방관아의 이방청을 살펴보는데 귀중한 자료이다.
Ο 용흥궁
• 시도 유형문화재 제20호
용흥궁은 강화도령으로 불렸던 조선 철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 14∼19살까지 살았던 곳이다.
원래는 초가집이었으나, 왕이 되어 떠난 후 강화유수 정기세가 현재와 같은 기와집을 세우고 용흥궁이라고 하였다. 1903년에는 청안군 이재순이 중건하였다.
현재의 건물은 내전 1동, 외전 1동, 별전 1동, 잠저구기비각 1동 등이다. 내전은 팔작지붕에 홑처마 주심포의 구조로 앞면 7칸, 측면 5칸이며, 건평은 90㎡이다. 별전은 ㄱ자형 집으로 앞면 6칸, 측면 2칸으로 건평은 95㎡이다.
Ο 우리나라 최초의 해군사관학교 (통제영 학당지)
인천시 기념물 제49호
해군사관학교 터는 강화로 들어가는 입구에 19세기 자주국방 의지를 실현하기 위해 설치한 우리나라 . 해군사관학교의 전신인 통제영학당(1893)이 근대식 교육기관으로 갑곶나루에 세워졌다.
19세기는 제국주의 열강이 식민지를 개척하던 시기였다. 이 시기 조선에는 이양선의 출몰이 빈번했고, 그에 따른 무력충돌도 자주 발생했다. 흥선대원군은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등을 치르면서 강력한 쇄국정책을 시행하여 서구 열강의 조선침입을 방어하고자 했다.
그러나 일본은 강화에 군함을 파견하여 조선의 무력도발을 야기시키고, 이를 계기로 1876년 불평등조약인 강화도조약을 체결하기에 이르렀다.
조선은 이러한 불평등 조약을 체결한 이후 근대식 군대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1893년 종래의 수군체제를 근대식 해군체제로 전환시키고, 청주에 있던 통어영을 남양으로 옮겨 해군 통어영으로 명명했다. 아울러 3월 22일에는 통제영학당 설립에 관한 칙령을 공포하고, 5월에는 군사적 요충지로 주목받아 온 갑곶나루에 자금 1000원을 들여 학교건물을 짓기 시작했다.
조선정부는 영국총영사관에 해군 군사교육을 위한 영국 해군 현역장교의 파견을 요청했다. 그러나 영국은 조선정부의 이러한 요청을 외교적 문제의 이유를 들어 현역장교가 아닌 예비역해군장교 (콜웰대위)1명과 하사관 1명을 파견하였으며 이들 교관들은 강화읍 관청리 250번지에 관사를 짓고 거처하였다. 이 학교는 1893년 10월 개교하였지만, 이듬해인 1894년 11월 폐교된 우리나라 최초의 해군사관학교 이다.
Ο 철종외가
문화재자료 제8호
철종외가는 1853년 강화유수 정기세에게 명하여 건립한 것이다. 그후 철종의 외삼촌 염보길이 살았으며, 후원에는 염씨 집안의 묘가 있다. 이 건물은 원래 안채와 사랑채를 좌우에 두는 H자형 목조건물로 45칸이 있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지금은 행랑채 일부가 헐려 ㄷ자 모양의 몸체만 남아 있다.
건축양식은 전체적으로 경기지역 사대부 가옥 형식을 따르고 있지만 안채와 사랑채를 일자로 곧장 연결시켜 화장담으로 간단하게 구획한 것이 특징이다. 당시 일반 사대부의 웅장한 집의 규모와는 달리 법도에 맞도록 고졸하게 지은 집이다.
출처 : 강화군 / 사진 : 강화로닷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