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돌목의 물결
손돌이의 죽은 넋이 매년겨울 매서운 추위와 거센 물결을 몰고 온다. 수백년 내려오는 강화도의 손돌추위라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광성보 안으로 쑥 들어가 용의 머리처럼 생긴 돈대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면 용트림을 하며 서센파도를 일으키며 강물이 흐르고 있다. 바로 이곳이 파도가 험하기로 유명한 손돌목 이다.
손돌목이란 좁은 문을 뜻하기도 하는데 바로 우리가 문을 여닫는데 사용하는 돌쪼기도 바로 이 ‘돌’ 자를 사용 한다고 한다.
고려 21대 희종이 몽고란을 피하여 자연도(용유도)로 뱃길을 재촉할 때 뱃사공으로 이름이 알려진 손돌사공을 선정하였다. 희종이 음력 10월 20일 이 곳 용두돈대 밑에 당도하니 손돌은 물살이 쎄고 바다가 막힌 곳으로 자꾸 배를 저어가자 ‘당황한 왕은 사공 손돌이를 역적으로 ‘ 의심하여 목을·제거했다.
손돌은 죽으면서 왕에게 “바다에 바가지를 띄워서 바가지가 가는 데로 따라 가면 바다가 트일 것이다·” 고 일러주고 죽었다고 한다.
말대로 바가지를 띄워 이곳을 통과한 왕은 손돌을 죽인 것을 후회하고 손돌을 김포쪽 강가 야산에 묻어주고 제사를 올려 주게 하였다.
지난 2005년 11월 11일 한강 시민공원 이천지구에 전시됐던 거북선을 서울시가 한산대첩의 고장인 경남 통영으로 기증하고 거북선의 운반을 강화도 북단 비무장지대를 통과하도록 UN 정전위와 합의 후 한강 하구에서 조강 -> 염하강을 따라 인천항으로 이동 하던 중 용두돈앞에서 급물살을 피하기 위하여 만조를 기다리기 위하여 하룻밤 정박하기도 하였다.
바로 앞 김포 덕포진에는 억울하게 희생된 손돌의 무덤이 있으며 이 곳을 “손돌목’ 이라 하고 매년 음력 10월 20일 경이면 강추위가 오는데 이 추위를 “손돌추위” 라고 전해온다. 용두돈대를 관람중이라면 한번 쯤 아래 바닷물을 강상해 보는 것이 좋겠다. 주변경관 역시 강화팔경으로 손 꼽히고 있는곳 이니까
손돌의 민담에서 나온 노산 이은상 선생의 시,(誇)를 한 수 소개한다.
사공은 억울한 죽음을 죽으며
그나마도 선심을 발휘하며
나는 원통하게 죽거니와 바가지를 물에 띄우고
그 바가지 흘러 가는 것만 따라가면 왕은 살 수가 있을 것입니다
원혼이 바람에 들어 이 바다에 떠돌면서
해마다 그 날이 오면 분하여 운다 하네
그 왕도 간지 오래니 잊어버리고 말려므나
손돌이 어진 사공 제 죽음 한 함이랴
고국정한(古國精限)을 풀어도 남겠구나
마니산의 단풍
마니산은 단군이 하늘에 제사를 올리던 참성단을 위시하여 천제의 제물을 준비하던 천제암 터, 함허대사가 창건한 천년고찰 정수사 등이 있어 고대이래 유서 깊은 곳이다.
4계절을 통하여 변화 무쌍하고 그윽하기로 저명하고 가을철 단풍은 강도팔경의 하나로 손꼽히며 자연경관이 기이하여 일일위락의 적지로 많은 관광객을 유치하고 있다.
1977년 3월 국민관광지로 지정되어 야영장 1623평, 매점 3개소, 취사장, 담수보 4개소, 활터 369평 등 조경공사를 깨끗이 정화하여 1982년 10월 준공하여 평소 주말이면 5000여명 휴가철, 연말에는 1만여명의 관광객들이 찾는 수도권 제일의 명산이다.
마니산 단풍은 강원도 설악산 보다 약 1주일 정도 뒤늦어 설악산과 내장산 중간 타임에 수도권에서 가장 가까운 단풍 명소로 가족단위, 연인끼리 찾아보기 안성 마춤이다.
초지진의 포대
효종 7년 강화외성 최 남단에 해상으로부터 침입하는 외적을 막기 위하여 구축한 요새로 1679년 장자평돈대, 섬암돈대가 축조 되면서 초지진에 소속 되었고 예하에 진남포대와 황산포대가 있었으나 지금은 그 자취만 남아있다.
고종 3년(1866) 천주교 탄압을 구실로 침입한 프랑스 함대와 고종 8년 통상을 강요하며 내침한 미국 로저스의 아세아 함대. 그리고 1875년 침공한 일본군함 운양호를 맞아 가장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격전지로 지금도 성벽과 노송의 허리에는 당시 포에 맞은 흔적이 남아 있어 마음을 아프게 한다.
현재 강화군내 복원된 전적지에 전시된 대포 중 초지진에만 유일한 진품으로 초지진을 가로 흐르는 염하와 초지진, 그리고 홍이포가 만나 환상의 강화팔경을 자랑한다.
전등사에서 들려오는 해질녘의 종소리
전등사는 우리나라에 불교가 들어와 나라의 종교로 인정을 받게 된 서기 372년(고구려 소수림왕 2년) 후 9년만인 서기 381년에 창건된 우리나라 현존하는 사찰중 가장 오래된 전통 사찰로 중국에서 태어나 불교를 전하기 위해 우리나라로 건너온 “아도” 라는 스님에 의해 창건되었다.
처음 창건당시 ‘진종사’ 라 불렸으나 그 뒤 고려때 충렬와의 왕비인 정화궁주가 전등사에 옥등을 희사 함으로서 ‘ 전등사’라 부르게 되었다.
수 천년 세월과 함께 주변경관도 수려하고 특히 보물 제393호인 전등사 범종은 우리나라 종이 아닌 중국종으로 종소리가 맑고 깊고 아름다워 예불을 알리는 해질녁의 종 소리는 수려한 경관과 어울려 강화 팔경으로 손 꼽힌다.
보문사의 석불
보문사는 동해의 낙산사와 남해 보리암과 함께 우리나라 3대 해양관음 사찰로 신라 선덕여왕 635년에 희정대사가 창건 했다고 한다.
보문사 법당 뒤로 418계단을 오르면 거대한 눈썹모양의 바위가 있다. 윈래 하나의 큰 바위인데 한 조각이 떨어져 내려와 자연 석굴이 되었다.
전설에 의하면 한 어부의 그물에 걸린 불상들을 이곳 석굴에 모셨다고 하며 큰 조각이 떨어져 내려와 눈썹처럼 생긴 원래 바위에는 높이 790Cm 폭 364Cm 정도의 마애관음상을 1928년 조성 하였다.
이 마애석불을 오르기 위하여 지그재그로 118계단을 놓았는데 각 계단에는 그 의미를 부여했다. 처음 12계단을 올라가면 좌우에 석등이 하나씩 있고, 여기에서 108계단을 오르면 ‘관음성전계단불사공덕비’가 있다. 또 108계단을 오르면 한 쌍의 석등이 또 있고, 다시 118계단을 오르면 반야용선이 있다. 여기서 48계단을 더 올라가면 드디어 마애관음보살좌상을 만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계단수는 도합 418개가 된다.
12 이나 48, 108, 118은 모두 불교에서 중요시 여기는 상징적인 숫자이므로 그 배치가 더욱 뜻깊고 의미가 있는 것이다.
118개의 계단을 다 오르면서 발 아래로 내려다 보는 서해의 풍경은 실로 한폭의 동양화를 보는듯, 실감이 난다. 속 시원하게 뻥 뚫어진 서해 바다위에 크고작은 섬들의 경이로운 조화, 또한 저녁 황홀한 낙조는 강화팔경의 풍치를 더해주고 있다.
갑곶의 대교
강화군민들의 가장 큰 숙원은 육지와 섬을 연결하는 다리로 1970년 1월 2일 강화대교가 개통되어 그 꿈을 이루게 되었다.
강화는 바다로 둘러싸인 섬으로 둘레가 배를 마음대로 접안할 수 없는 특수한 지형을 이루고 있다. 서해안 특유의 빠른 물살과 험류로 인하여 고려시대 몽골군이 빤히 건너다 보이는 강화도를 함부로 건너오지 못했던 것은 그 만큼 육지를 왕래하는 교통이 열악했음을 의미한다.
이 때문에 강화 사람들의 육지 나들이는 대형 선박보다는 주로 나룻배를 이용해야 했고 이에 따라 갑곶진·승천포를 비롯한 26개소의 나룻터가 발달되었다.
한국전쟁 후 미 해병대가 사용했던 상륙용 주정(舟艇)을 도선으로 개조하여 김포에서 오는 육지 승객을 버스에 태운 채 1일 7회로 시잓하여 30회까지 증회, 성동과 갑곶사이를 건너게 했다. 그러나 문제는 급속도로 발달하는 육지의 차량을 수용하는 것이었다. 주민들의 불편을 덜어야 하는 것은 물론 늘어나는 관광객을 유치해야 하는 숙원이 기다리고 있었다.
군민들은 1945년 해방 직후부터 ‘강화대교건설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성금을 내는 등 교량을 가설하기 위한 운동을 백방으로 벌였었다. 그 열망이 1965년 7월 착공되어 총공사비 5억 8700만원을 들여 4년 7개월만인 1969년 12월 30일 완공되고 3일 후인 1970년 1월 2일 개통되었다
강화대교를 안고 있는 갑곶은 강화도의 관문으로 조선시대에는 강화도의 승군을 통제하던 진해사의 진해루를 통하여 입성 하였으며 우리나라 최초의 해군사관학교 그리고 천주교가 입성한 곳이기도 하다.
또한 외국 사신들이 강화도를 내왕할 때 배를 기다리는 동안 사신들을 접대하였다는 이섭정은 지금 이라도 옛 선비들의 싯귀가 읊어 나올 듯 만 하며 이섭정과 강화대교 그리고 갑곶돈이 함께 어우러져 강화팔경을 자아내고 있다.
연미정의 달맞이
연미정은 임진강과 한강이 만나 서해로 흘러오다가 강화 북쪽에서 한쪽 물길은 서해로, 또 하나는 갑곶의 앞 염하강을 지나 인천쪽으로 흐르는데 그 모양이 마치 제비꼬리와 같다하여 정자의 이름을 연미정이라고 하였다.
이 정자는 강화 8경의 하나로 손꼽히는 절경을 이루고 있어 북으로는 개풍군과 파주시, 동으로는 김포시 한눈에 들어오기도 한다. 옛날에는 서해로부터 서울로 가는 배가 이 정자 밑에 닻을 내려 조류를 기다려 한강으로 들어 갔다고 한다.
정자는 주위에 석축이 둘러쳐져 있고, 월곶돈대 안에 사방 8m정도의 바닥을 높이고 10개의 돌 기둥을 세워 지붕을 얹어 만들었다. 정자 양쪽에는 약 500년이 넘은 느티나무 두 그루가 웅장한 자태로 그 정취를 더해 주고 있었지만 한그루는 2019년 태풍 링링에 쓰러져 그 절경을 볼 수 없다.
연미정은 달빛이 없어도 경관이 매우 빼어나다.
한강과 임진강 하류가 이곳에서 합류하여 조강을 따라 황해로, 염하로 흐르는 강물과 고요하기만 한 북한땅이 눈앞에 병풍처럼 펼쳐진다.
적석사의 낙조
깅화팔경중의 하나인 적석사 낙조봉에서 바라보는 서해 낙조이다.
적석사 낙조봉은 우리나라 3대 낙조 조망지로 서울 경북궁을 깃점으로 정 동쪽이 해돋이로 유명한 강원도의 정동진이며 반대로 정 서쪽이 해지미로 유명한 이곳 적석사 낙조봉이다.
낙조봉은 진달래 군락지로 유명한 고려산 남록 끝자락에 위치해 있고 적석사 주차장에서 약 10분 정도 산길을 걸으면 서해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며 크고작은 섬들, 그리고 올망졸망 정겨운 농촌 풍경이 한데 어우러져 한폭의 그림을 자아낸다. 위의 사진은 적석사 선암스님이 낙조봉 관람객을 위하여 마련한 낙조 조망대 이다. 매년 연말이면 이곳에서 송년 해지미행사와 다음날 새해 일출행사를 동시에 갖는다.
낙조봉의 봄은 역시 진달래 군락지 이다. 낙조봉에서 고려산 정상으로 산행으로 약 1시간 정도면 우리나라 최대의 진달래 군락지로 매년 4월 3째주 주말이 진달래꽃 만개를 이룬다.
여름이면 하늘을 찌르듯 솟아있는 소나무의 향긋한 향기에 취하며 삼림욕을 즐기기에 안성맞춤이며 가을이면 이름모를 야생화가 온 산을 수 놓은다.
겨울이면 더욱 좋다 사람키를 넘나드는 1만여평의 갈대밭에서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 수 도 있고 낙조 역시 겨울이 제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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