Ο 봉은사지
위치 : 강화군 하점면 장정리 산193
시대 : 고려
봉천산 남쪽에 위치한 이 절터의 상·하부는 급경사를 형성하며, 직사각형우로 길이 78m, 너비 29m 정도이다. 석탑 일원은 길이 약 33m 정도로 석축이 조성되어 있다.
석탑의 남서쪽에 우물지가 남아 있어 현재도 물이 고여있다. 각 면 길이 2m 정도의 정방형으로 깊이는 1m 내외이다. 20~50cm 크기의 할석을 이용하여 쌓았으며, 하부 방향으로 배수로가 있다. 봉은사지는 고려시대에 강도 천도 이후 개경의 봉은사를 유지하기 위해 관리의 가옥을 사찰로 변경한 것이라는 기록과 산포된 유물의 양상으로 보아 고려중기~조선초기에 운영 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고려사』에 의하면 봉은사 창건 이후 왕의 행차를 위해 민가를 헐고 길을 넓혔다고 하고, 이후 자주 봉은사에 행차한 기록이 있어 왕실의 관리를 받았던 사찰임을 짐작할 수 있으나 사역 추정 범위는 상당히 좁은 편이다. 탑을 중심으로 하는 예불공간과 우물지 좌측의 평탄지 내에 생활공간이 조성되었을 것으
로 보인다. 비록 일반 민가를 사찰로 변경한 경우지만 고려 후기에는 석탑도 조성되었다고 하므로 이후 중창을 통해 높은 사격으로 운영되었을 것으로 보이며 일원의 매장유구 잔존 가능성은 매우 높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고려 고종 36년에서 46년까지 매년 2월에 연등회를 개최 하였다고 하여 고려시대 강화도 내에서 상당한 사세를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현재 봉은사터에는 보물 제10호 강화 장정리 오층석탑과 우물이 남아 있다. 잔존 우물지의 깊이는 1m 전후이다.
Ο 묵왕사지
위치 : 강화군 강화읍 용정리 700 번지 일원 (N37;44;19.4 E126;30,49.6)
시대 : 미상(조선)
묵왕사의 창건 및 폐사에 관련된 문헌은 없고 다만 1932년 기록인 속수증보 강도지에 갑곶리 龜峴(구현) 동쪽 기슭에 입지한다고 하며, 당시 와편과 초석, 우물지도 있었다고 한다.
강화대교에서 강화읍 방면으로 48번 국도 김포 쪽에서 현대아파트 사거리 우측 방향의 두올 방면으로 길게 들어가면 먹절이라는 마을이 나온다. 이곳 먹절 끝단에 절이 있었다고 전해오며 이곳을 묵왕사가 있어 먹절로 불린다.
묵왕사는 1930년대 까지 일원에서 유구와 유물이 확인되어 일반적으로 평지형 사찰로 추정된다. 현재 소량의 기와편과 백자편 등이 수습될 뿐 관련된 흔적은 확인되지 않는다고 한다.
현재 살기좋은 마을 이라는 연립주택 건립으로 인한 매장 유구의 잔존성이 희박하다.
Ο 병풍암 절터
위치 : 강화군 강화읍 남산리 산 66(N37;43;538 E126;28;153)
시대 : 미상(고려)
강화읍의 남산을 둘러싸고 있는 남산 남서편의 8부 능선에 달한다. 강화읍 보건소에서 충렬사 방면으로 진행하다 보면 길 오늘쪽으로 남산굿당으로 올라가는 소로가 나온다 이 길을 따라 남산 굿당에 오른 뒤 다시 산길을 따라 5분정도 올라가면 바위가 병풍처럼 서 있는 주변으로 사방 20여m 가량의 평탄지가 있다. 이 바위를 병풍바위라 하는데 바위 아래 평탄지에 절이 있었다고 한다. 병풍암 절터는 인접해 있는 전등사의 말사(末寺)로 되어 있으나 전등사의 소재는 확인할 수 없다. 병풍암 절터에는 청자와편 등 유물이 일부 수습되지만 사찰과 관련된 유구는 보이지 않는다. 이곳은 현재도 남산 굿당에서 제를 지내는 장소로 이용되고 있다.
Ο 범머리사지(용정리)龍井里범머리寺址
위치 : 강화군 강화읍 용정리 254번지 일원
시대 : 미상(조선)
범머리 언덕 서쪽 능선부에 위치하고 있는 범머리사지는 기조사 결과 건물이 입지할 수 있는 평탄지와 기와편, 청자편 등이 수습된 곳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사역으로 추정되는 254번지 일원에는 기쁜소식강화교회가 2005년에 건립되어 기 조사내용을 확인할 수 없었다. 이 교회는 동쪽 능선부를 절토한 후 지하시설까지 조성하였기 때문에 매장유구 잔존가능성은 매우 낮다. 다만 교회 주변 256, 257-1번지와 산41-1번지 일원에서 음각 청자편과 백상감 청자편, 어골문 와편 등이 산포되어 있으며, 수파문 와편과 백자편 등도 확인되어 교회 주변 민묘와 경작지 일원은 매장유구가 잔존할 가능성이 있다고 여겨진다.
Ο 송악사지
위치 : 강화군 강화읍 대산리 산 129-1(N37;45;191 E126;29;189)
시대 : 미상(조선)
강화산성 북문에서 북쪽으로 약 200m 정도에 있는 송악마을에 절터가 위치한다. 이곳은 북산의 북사면 사이에 형성된 넓고 완만한 계곡부의 끝단에 형성된 평지이다. 몇 년전 까지 포도밭으로 경작되고 있었는데 현재는 농사를 짓지않는 탓에 잡초가 우거져 있다. 약간 넓은 장방형의 절터로서 길이는 약 70m 가량이며 남쪽 길이는 10~20m 가량이다. 단의 높이는 1m 내외로 일부 구간에 석축이 남아있다. 현재 석단 이외에 건물과 관련한 유구는 확인되지 않지만 조선시대 와편등이 흩어져 있다.
Ο 왕림사지
위치 : 강화군 강화읍 옥림리 467번지 일원(N37;45;156 E126;29;586)
시대 : 미상(고려)
강화 동문에서 월곶리로 향하는 도로를 따라 옥림 2리 마을회관 앞에서 좌측의 마을로 들어가는 소로가 나온다 이 길의 끝까지 가면 계곡 입구에 민가 1채가 있는데 이 민가 뒤편 계곡 사이에 절터가 자리한다. 이 마을의 지명이 왕림골인데 예로부터 왕림사라는 절이 있었기 때문에 생겨난 이름이다.
절터는 남동향으로 규모는 동서 30m 남북 45m 가량이다. 서측은 없어지고 대부분 토축만 남아있다. 절터의 조성 연대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지만 절터 내에서 청자편 등이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창건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Ο 국화리용장사지(菊花里龍藏寺址)
위치 : 강화군 강화읍 국화리 462번지 일원
시대 : 고려
고려 팔만대장경을 용장사에 보관했었다는 기록이 있는 국화리용장사는 강화읍 국화리 저수지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우측으로는 군부대가 형성되어 있고, 남쪽으로는 국화저수지가 위치하며 최상단 남쪽으로는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마을 형성과 경작지 활용으로 인해 현재 사역으로 추정되는 462번지 일원에서 건물 관련 유구는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경작지 내에서는 건물유구로 추정되는 치석재들과 토기편, 청자편, 백자편, 전돌편과 집선문, 어골문, 복합문 와편 등이 산포되어 있지만 엣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국화리용장사지는 현재 용정리용장사지와 사명이 동일한 이유로 기조사에서 혼동되고 있다. 그러나 龍藏峴에 용장사가 입지했다는 기록이 맞다면 국화리보다는 용정리의 용장사지가 고려시대 문헌과 관련된 용장사로 판단된다.
용장사는 고려 때 창건된 강화도의 사찰 중에 상당한 사세를 가졌던 사찰 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기록에 따르면 용장사는 부의 서쪽 3리에 있었고 고려 충렬왕이 이 절에서 왕위를 양보하고 독살 당하였다고 한다. 현재 이곳은 펜션들이 서 있어 절터의 모습을 살펴볼 수 없다. 과거 조사기록을 통해 보면 크게 2지역으로 나뉜다. 현재 5호 군도에 인접해 절터가 위치하고 그 북쪽의 계곡부에 또 하나의 절터가 있었다고 한다 도로변의 절터는 대략 동서 50m, 남북 40m이 규모로 산의 경사면에 형성된 용장사의 암자 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Ο 진해사지
위치 : 강화군 강화읍 갑곶리 1082
시대 : 조선
강화읍 갑곶리 뒷산에 위치한 사찰로 지금은 해운사라는 절이 자리하고 있다. 강도지의 기록에 따르면 진해사는 갑곶나루 서쪽 언덕에 `1692년 세워졌다. 숙종 17 (1829)년에 스님을 모아 이 일대를 수호하게 하고 승사를 짓거나 토성을 쌓게 했다는 기록들을 종합해 보면 진해사는 군사작전 목적으로 창건된 절로서 사찰 안에는 승군 1개 소대가 주둔하고 있었다고 한다.
Ο 퇴모산 무명사지
위치 : 강화군 불은면 삼성리 산186
시대 : 미상
양도면 인산리 비선거리 삼거리에서 인산리 석실분 안내표지판을 따라 동쪽 산으로 1.1Km정도 올라가면 인산리석실분 400m 이정표가 다시 나온다 이 이정표의 반대방향 즉, 우측으로 약 900m 정도 더 올라가면 무명사지가 나온다 3개의 축대를 볼 수 있으며 유구는 와편외에 확인이 불가하고 인근에 백제시대 횡구식 고분으로 추정되는 고분과 고려시대 고분 등이 산재하고 있다. 사지에 대한 문헌은 찾아볼 수 없다. (2020. 12)
Ο 흑룡사지
위치 : 강화군 강화읍 국화리 157
시대 : 미상
고려산 남동쪽 국화리에 고려고종의 무덤인 홍릉이 자리하고 있다. 홍릉의 아랫쪽에는 국화리 학생 야영장이 들어서 있는데 이 아영장이 홍릉의 능사였던 홍릉사지가 있던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교육시설들로 현상이 완전히 변형되어 있어 유적의 위치를 짐작하기는 어렵다. 다만 1988년 보고에 따르면 현재 구름다리가 설치되어있는 지역이 절터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Ο 황련사지
위치 : 강화군 강화읍 국화리 282
시대 : 조선
황련사는 천축조사의 오련사화의 관련이 있는 사찰로 강화 남산리 북쪽에 위치한다, 강화읍에서 국화리 저수지로 가다보면 저수지 시작되는 초입에서 좌측 계곡으로 올라가는 소로가 나오는데 이 소로 좌측으로 150m 가량 산으로 올라가면 유적이 위치한다.
현재 이곳은 절터의 흔적은 남아있지 않고 다만, 고종 4년에 강화군 참사를 지낸 윤상건이 절터위에 지은 보만정의 초석과 기단만 남아있다. 자연석을 허튼석쌓기로 쌓아올린 축대는 북향이며 규모는 동서 약 22m, 남북 15m 높이는 1m 내외이다.
Ο 원층사지
위치 : 강화군 하점면 이강리 산171
시대 : 고려
하점면 이강리 천자문 박물관 조금 못미쳐 대로변 부터 이정표를 따라 산길로 1시간 정도 올라가면 쉽게 찾을 수 있다. 현재도 원층골이라 부르고 있으며 나무가 우거지고 축대도 무너져 원래의 절 규모는 알 수 없지만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 돌로 만든 유물들로 미루어 보아 꽤 큰 절터로 보인다.
불상은 보이지 않지만 큼직한 연꽃무늬 대좌는 남아 있어서 석불상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석탑 부재들도 많이 남아 있는데 특히 석탑 옥개석은 모두 있을것으로 보고 있다.
3단의 옥개 받침이나 독특한 수법은 고려작품임을 잘 말해주고 있다. 따라서 강도지의 기록대로 남아있는 석탑이나 불상의 부재들은 당시 불교미술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고려 후기의 이 절터는 계곡 상단부에 기단을 쌓아 터를 만들었으며 서남향을 하고 있다. 기존 조사에서는 전면에 길이 약 30m의 계단시설이 있고 절터 내에 고려 양식의 석탑부재가 흩어져 있다. 원층사는 고려 고종이 천도한 후 술사 백승한의 진언에 의해 1232~1259년 사이 건립된 뒤 법회가 열렸다고 한다.
Ο 수월사지
위치 : 강화군 하점면 장정리 산720
시대 : 미상
수월사는 봉천산 줄기의 남동방향으로 하점면 장정 2리 마을회관에서 소로를 따라 이동, 계곡 하나를 지나면 계곡 중간에 석단으로 축대를 쌓은 절터가 자리한다. 전형적인 산지가람으로 산의 지형과 계곡을 잘 이용하여 평지화하고 축대를 쌓았다.
절터의 규모는 총 3단으로 동서는 40m, 남북은 30m 정도된다. 1단과 2단은 얕은 축대의 흔적만 남아있고 3단 축대는 높이 2m 가량으로 대부분 붕괴되기는 했지만 형태가 어느정도 남아있다, 축대 상부에는 건물지의 흔적으로 추정되는 석렬이 노출되어 있다. 수월사는 16세기 이전에 창건되어 18세기 후반에 폐사된것으로 보고있다.
Ο 대정사지
위치 : 강화군 내가면 외포리 산90
시대 : 미상
강화 외포리 포구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국수산의 정상부 바로 아래에 위치한다. 외포리 청소년 유스호스텔에서 포장도로를 따라 산정상부로 이동하면 약수터가 나오는데 약수터에서 좌측 상단에 절터가 있었다고 전한다 현재 얕은 축대의 흔적만 일부 남아있을 뿐 절터와 관련된 뚜렷한 유구의 흔적은 찾아보기 어렵다. 한편 대정사의 이름은 절터 아래에 못이 있었는데 샘물이 잘 흘러 시내를 이루는 큰 우물이었다고 하여 지어진 것이라 한다.
Ο 선원사지
위치 : 강화군 선원면 지산리 산133
시대 : 고려
선원사는 강도시대의 실력자 최우의 원찰로 한때 그 규모를 자랑했던 거찰 이었다. 강화도로 도읍을 옮긴 고려는 도읍으로서의 품격을 갖추기 위해 궁궐을 비롯한 여러 건물들이 필요 했지만, 또한 대몽항쟁을 위한 국민 총화의 일환으로 선원사를 세우게 되었으니 당시 송광사와 함께 2대 사찰로 손꼽힐 정도로 중요한 사찰이었다. 사찰에는 금붙이로 만든 불상 500기가 모셔져 있었고 1248년에 고종이 선원사에 행차한 기록이 남아있을 정도로 대단한 사찰이었다. 그러나 환도 후 점차 절이 무너지고 그 위치 조차도 분명하지 않게 되었다. 이 절은 고려대장경을 판각하는 사업과 관련하여 이곳이 대장경을 새기고 그것을 보관하던 간경도감이 있었다 한다.
Ο 용당사지
위치 : 강화군 선원면 연리 422
시대 : 조선
용진진에서 초지진방향 용당돈대 못미쳐 언덕입구 좌측의 휴게실 아랫부분이다. 현재 경작지로 이용하고 있는데 이곳이 용당사터 이다. 사찰과 관련된 흔적은 남아있지 않고 소량의 기와편이 수습될 뿐이다. 용당사는 강도지에 강화 외성의 수비를 위하여 1692년에 본부로 부터 중(僧)을 모집하고 장교들로 하여금 감독케 하여 1693년에 창건되었다고 한다.
사역 내 평탄지는 현재 농원으로 이용 중이며 경작을 위한 경지정리로 인해 사역 내 건물지 유구는 확
인할 수 없었으나 수파문 와편과 백자편이 경계부에 일부 산포되어 있다.
전언에 의하면 경작지를 조성하면서 초석 같은 석재들을 바다로 던졌다고 하며, 80여 년 전에 불상도 다른 곳으로 옮겼다고 하나 현 소재는 알 수 없다고 한다. 사역 동쪽 해안 일원은 강화외성이 있던 곳으로 알려져 있으나 성벽과 관련한 유구는 확인되지 않으며 어골복합문(어골문+격자문), 무문 와편과 전돌이 산포되어 있었다.
Ο 안양사지(조산리) 安養寺址
위치 : 강화군 양도면 조산리 산40
시대 : 미상
안양사지는 양도면 조산리와 교동도 2곳에 위치하여 편의상 조산리 안양사지를 1 교동도 안양사지를 2로 지칭히고 았다. 조산초등학교에서 능내리 방향으로 가다가 오른쪽 국정마을로 들어가는 2번째 소로에서 우회전 하여 진행하면 길이 끝나는 지점에 독립가옥이 나온다. 이 가옥 주변에 안양사가 있던 자리이다. 이곳은 현재 경작지로 지표에서 건축부재로 보이는 석재들이 산재하고 있지만 정확한 성격은 알 수 없다.
전체 사역으로 추정되는 곳은 우물지가 확인된 324번지를 중심으로 하는 1구역과 계곡 반대쪽에 위치한 1구역 동쪽의 평탄지 일원인 2구역으로 구성된다. 1구역은 현재 경작지로 이용 중이며, 324번지 내에 직경 1m 가량의 원형 우물지가 남아 있다. 현재 사용하지 않고, 경작지 경계부에 위치하고 있어 일부 결실되어 있지만 대체적으로 원형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326번지 민가 앞에도 우물이 남아 있다.
Ο 흥천사지
위치 : 강화군 양도면 삼흥리 산344
시대 : 미상
절터는 삼흥리의 흥천부락의 동북쪽 끝에 위치한다 양도초등학교 주변 우사를 따라 뒷편 계곡부에 흥천사지와 흥천사 암자터가 있다. 이곳은 강화도 중앙부에 자리한 덕정산의 북서쪽 줄기의 끝단에 해당하는 곳이다 자리는 남서방향으로 하고 있으며 규모는 남북 35m, 동서 50m 가량이다. 절터는 크게 3구역으로 구분되어 높이는 약 1m 가량의 축대 일부가 남아있다.
흥천사지는 중앙에 비교적 넓은 공간이 있고 그 위로 묘역 앞에는 두 단의 얕은 축대로 폭 25m, 깊이 20m 내외 정도의평탄지가 조성되어 있다. 중앙공간을 중심으로 동쪽에는 다시 중앙의 단보다 폭이 10m 정도로 좁은 두 단이 형성되어 있는데 이 두 단 중 아랫단은 중앙공간의 동쪽과 닿아 있을 정도로 아래로 내려와 있다. 암자지는 건물지를 구성했을 것으로 생각되는 석축이 자연지형을 따라 놓여 있는데 좌향은 남서향이다. 자연석을 3~5단 쌓아 조성한 석축이 2개소로 추정되지만, 잔존부분은 일부에 그치고 있다.
흥천사지의 북동쪽에 있는 암자지는 2~3동 정도 규모의 사역으로 생각되며, 민가와 이에 딸린 경작지에 의해 사역의 남서쪽이 비교적 심하게 훼손된 것으로 생각되며, 그 외 지역의 석축 및 석축의 흔적이 남아 있어 중심사역의 지하유구는 온전할 것으로 생각된다. 암자지는 인위적 훼손보다는 폐사에 의한 점진적 훼손이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Ο 혈구사지
위치 : 강화군 선원면 선행리 산 108
시대 : 고려
강화 남산의 남쪽에 위치한 충렬사에서 선행리 방면으로 가다보면 좌측으로 강화섬김치 공장이 있는데 이 김치공장을 끼고 선행리 시리미 마을로 들어가는 소로를 따라가다 보면 계곡 안쪽으로 전원주택 단지가 들어서 있다. 이 주택단지 일대가 혈구사가 위치하였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혈구사는 고려 고종 46년에 지어진 사찰로 정족산 가궐을 세울때 함께 지었다고 전해진다. 원종 5년에 이 절에서 대일왕도장(大日王道場)을 베풀고 친히 행차 하셨다 한다.
혈구사지는 계곡 최상류의 좁은 공간에 석축을 높이 쌓아 터를 닦아 조성한 사찰로, 규모 자체는 그리 크지 않은 것으로 판단된다. 기록에 의하면 1259년(고종46년)에 창건되어 원종대 이후에도 왕실과 밀접한 관련을 맺으며 사세를 유지해 왔던 것으로 확인되며, 17세기 이전에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기록상의 운영시기는 사역의 산포유물의 내용과도 일치하고 있다. 현재 사지는 등산로 옆 가파른 계곡부에 위치하고 있어 인위적인 훼손의 우려는 적은 편이나, 식생 및 토사 유출로 인해 석축의 붕괴가 진행되고있다.
Ο 혈구산 무명절터
위치 : 강화군 선원면 선행리 195-3
시대 : 미상
혈구산 정상에서 북서쪽으로 뻗어 내린 능선 바로 아래에 위치한다. 이 곳은 고려산과 혈구산 사이에 있는 나래현으로 부터 혈구산 정상으로 오르는 등산로를 따라 이동하다가 중간에 좌측으로 능선사면을 따라 이어지는 길로 접어들면 쉽게 절터에 도달할 수 있다.
절터가 위치한 곳은 능선 정상에서 급한 경사가 시작되면서 계곡이 시작되는 지점으로, 막돌로 축대를 쌓아 절터를 조성하였다. 절터는 동남향을 하고 있으며 3단의 축대로 구성되어 있다. 2단은 높이 1~2m, 길이 13m, 폭 10m 내외이며, 2단은 축대 높이와 길이가 각각 2m, 6m이며 기단 상면의 크기는 동서 4m, 남북 5m, 가량이다.
Ο 금사골절터
위치 : 강화군 양도면 조산리 산53
시대 : 미상
절터는 진강산의 남쪽 사변에 자리한 조산리 금사골의 동북쪽 산자락 끝에 위치한다. 이 곳은 조산초등학교에서 서쪽으로 약 300m 가량 떨어진 곳으로 도로변에서 조망이 가능하다 본래 국정사지로 보고되었으나 2002년도 조사에서 금사골사지 명명 하였다. 현재 절터로 추정되는 곳은 사방 20m 가량의 넓은 평지가 형성되어 있으며 오래된 민묘들이 많이 들어서 있다. 과거 조사에서 초석과 기단석 일부가 확인 되었다고 한다.
Ο 흥왕사지
위치 : 강화군 화도면 흥왕리 산36
시대 : 고려
흥왕사지는 마니산 남록 중턱에 위치한다. 흥왕리 흥왕초등학교 뒤편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전원주택이 몇 채 있다. 이 곳에서 계곡을 따라 5분여 가량 올라가다 보면 계곡이 양갈래로 갈라지는 가운데쯤 공터에 3단의 축대를 쌓아 절터를 조성하였다.
남향을 하고 있는 절터는 후면의 경사지가 40도에 가까운 급경사를 이루고 있고 전면에는 완전한 평지가 펼쳐져 있다. 절터의 전체 규모는 동서 길이가 45~69m, 남북 길이가 80m 가량이다. 최 상단의 뒷면에 토사유출을 막기위한 축대를 쌓았는데, 이 축대로 부터 일정한 거리를 두고 좌 상단 축대를 쌓았으며 다시 이 상단 축대에서 건물이 들어설 만한 공간을 두고 중단축대와 하단축대를 쌓았다.
현재 흥왕사지 내에는 탑 부재가 산재해 있다.
석탑부재 주변에는 건물관련 부재로 판단되는 방형 치석재들이 확인된다. 각 치석재들은 가단부재로 보이는 120cm~174cm 정도의 장방형 석재 3기와 초석으로 추정되는 75cm 크기의 정방형 석재 1기가 있다.
산포되어 있는 유물은 주로 미구길이 6cm이상의 무문와편과 선문, 집선문, 격자문, 사격자문, 어골문와편, 분청자편, 토기편, 청자편 등이다.
흥왕사는 선원사, 왕륜사와 더불어 대장경과 관련이 있는 사찰로, 고려시대에 중요한 사찰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기록에 의하면 속장경의 간경도감을 이곳 흥왕사에 설치하였고, 고려 문종의 기도처 이기도 하였다. 한편 흥왕사에서 서쪽으로 500m 떨어진 곳에 고려 이궁터가 자리하고 있는데 서로간의 관련성이 주목된다.
Ο 묘지사지
위치 : 강화군 화도면 사기리 산36-23
시대 : 고려
절터는 마니산의 북쪽 줄기인 초피산의 남쪽 계곡부에 위치한다. 강화 사기리에 있는 이건창 생가의 서쪽 마을로 올라가다 보면 도로가 끝나는 지점에 넓은 경작지가 보인다. 이 곳은 계곡이 시작되는 지점으로 북쪽에 상수도 시설이 설치되어 있다. 이 상수도 시설을 끼고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계곡의 동쪽 사면에서 절터가 확인된다.
절터는 남서방향으로 3단으로 구획되어 있으며 절터와 배변에 자연 암반벽이 병풍처럼 자리하고 있다. 최 하층 축대는 높이가 2m로 자연석을 활용하기는 했지만 축조기법이 정교한 편이다. 절터의 동편에는 길이 30m 가량의 담장열이 남아있다. 기단 상면에서는 초석 등과 같은 건물 흔적은 확인되지 않는다. 전체적으로 절터의 보존상태가 양호하다. 원종이 삼랑성에서 오성도량을 베풀고 다음날 묘지사로 갔으며, 또 같은 날 친히 참성단에 올라 제사를 올렸다고 전해져 강화 천도기 전후에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후 묘지사에 대한 기록이 없어 언제 폐사 되었는지 알 수 없다.
묘지사지는 고려 원종이 도량을 펼치고, 마니산 참성단 제사와 관련해 거쳐 간 곳으로 기록되어 있다. 창건 및 폐사에 관한 기록은 없으나, 유물의 양상을 통하여 고려후기부터 조선전기까지 경영되었던 사찰로 추정된다. 비교적 유구의 보존상태가 양호하기는 하지만 근래에 자라기 시작한 임목에 의한 훼손이 진행되고 있다. 부토가 두꺼워 건물지 양상 및 다수의 유물은 확인되지 않으나 사역을 구성하는 석축 및 담장시설과 계단시설로 추정되는 석재가 확인되고 있어 매장유구의 잔존 가능성이 높다.
Ο 묘통사지(妙通寺址)
위치 : 강화군 화도면 상방리 산91번지
시대 : 고려
창건과 폐사에 관한 기록이 확실하지 않은 묘통사는 마니산 북쪽에 있는 국립공원 입구에서 등산로를 따라 올라가다 보면 칠선교가 나오는데 이 칠선교를 건너 좌측(서남측) 오솔길을 따라 50m 가량 떨어진 지점에 절터가 위치한다.
이 곳은 절토골로 불리는 지역으로 계곡으로 부터 15m가량 떨어진 곳에 약간 둔덕을 이루고 있는 평탄지가 조성되어 있다. 평탄지의 규모는 동서 20m, 남북 40m 가량이다 현재 사찰과 관련되 유구,유물은 확인되지 않는다. 묘통사는 고려 문종, 숙종, 예종, 희종이 이 절에와서 마리지천동량을 베풀었다고 한다.
Ο 왕륜사지
위치 : 강화군 화도면 장화리 산6번지 일원(N37,618 E126,411)
시대 : 고려
마니산 서쪽 흥왕리에서 마니산 북쪽의 내리를 연결하는 하늘재(큰 메너미고개)라고 하는 고개가 있다. 흥왕리에서 내리 방면으로 고갯길을 따라 올라 가다가 고개 정상부를 넘어 가다보면 왼쪽에 철조망으로 담장이 쳐져있는 주택이 나오는데 이 집과 맞은편 계곡을 따라 200m 정도 올라간다.
사지 추정징서는 중심석축과 건물기단이 확인된다. 주변 지형은 자연 암반들이 병풍처럼 쌓여있다.
절터는 서향으로 규모는 동서 16m, 남북 20m 가량이다. 후면에 큰 자연 암반을 등에 지고 있다. 축대는 1단만 남아 있는데 축대 높이는 3m, 폭은 20m 정도이다. 축대 중간에 계단이 있는데 지금은 붕괴된 상태이다.
사지의 북쪽에 맷돌 1기가 있다. 자연석을 깍아만든 맷돌 아랫짝의 크기는 120X100cm 정도로 맷돌만의 직격은 45cm이다. 주변으로 약 10cm 정도 홈을 막파기 형식으로 파내어 곡물이 자연스럽게 흘러내리도록 하였다. 사지 전역에서 종선문, 어골문, 수파문 등 와편이 다수 확인된다.
Ο 천재암지
위치 : 강화군 화도면 문산리 산64-2
시대 : 고려
마니산 북쪽의 문산리에 마니산 금표가 있는데 금표에서 계곡을 따라 남쪽으로 5~7분 가량 이동하면 서쪽 능선위로 올라가는 길이 나온다. 이 길을 따라 올라가면 약수터가 나오는데 약수터에서 좌측으로 50m 떨어진 지점에 천제암지가 있다.
천제암지는 동향이며, 사방 15m 정도의 평탄지에 자리하고 있다. 최 상단에는 길이 4m의 축대가 쌓여있고 그 아래로 동서 8m, 남북 11m의 넓은 기단을 조성하였다. 하층 기단은 높이 1m, 길이 15m 이다.
Ο 갈공사지
위치 : 강화군 교동면 고구리 233
시대 : 고려
교동 대룡리 읍내에서 고구리 방면으로 진행하다 보면 고구리 저수지가 나온다. 이 저수지를 지나자 마자 좌측으로 저수지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100여 미터를 진행하다 고구리 마을회관이 나온다. 이 마을회관 뒷편의 능선에 갈공사가 자리했던 곳으로 전해온다. 현재 사지로 추정하고 있는 지역은 경작지로 이용되고 있어 절터를 알 수 있는 흔적은 남아있지 않다.
갈공사는 목은 이색의 수행처로 알려진 사찰이다. 목은은 고려가 멸망하자 갈공사에 칩거하면서 태조 이성계의 간곡한 청에도 나서지 않았다고 한다.
Ο 미륵사지(彌勒寺址)
위치 : 인천광역시 강화군 하점면 신봉리 산128번지
시대 : 조선
봉천산 서쪽 줄기의 남사면에 위치한 사지이다. 신봉리에서 북쪽으로 보이는 산 정상부 암벽 아래 부분에서 서쪽으로 50m 거리에 있다. 후면에 자연암반을 두고 전면에는 축대를 쌓아 평탄지를 조성하였다. 평탄지의 크기는 길이 15m, 너비 10m 정도로 소규모이며, 남향을 하고 있다. 석축은 길이 18m, 높이 1.5m의 크기이며, 20~80cm의 할석을 이용하여 9단 정도 쌓았다. 이석축의 서편에서 진입로로 추정되는 소규모 축대가 확인된다. 길이 3m 정도 잔존하며, 높이는 1m 정도이다.
평탄지의 입지는 급경사면에 위치하고 있어 토사가 유출된 상태이며 유물은 토사유출의 영향을 받아 확인하기 어렵다.
미륵사지는 급경사면에 축대를 쌓고 소규모 건물지를 마련하였으며, 규모와 입지상으로 볼 때 작은 암자터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사지의 운영시기는 유물이 토기 1편만 확인되어 추정하기 어렵지만 문헌자료를 통해 조선초부터 조선중후기까지 운영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지는 토사 유실에 따른 피해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축대 가운데 부분이 입목의 뿌리에 의해 유실되면서 앞쪽으로 쏠려 붕괴위험이 있다.
Ο 안양사지(교동도) 安養寺址
위치 : 강화군 교동면 상룡리 199-1
시대 : 미상
교동 월선포에서 대룡리로 진행하다 보면 상룡리 방향의 갈라지는 삼거리가 나온다. 절터는 이 사거리의 북서쪽의 구릉 사면에 자리한다. 현재 얕은 석축 일부를 제외하고 이 곳에 절터를 알 수 있는 흔적은 남아있지 않다. 절터의 규모는 대략 사방 20m 정도로 추정한다.
절의 이름은 전하고 있으나 사역 범위가 이미 기조사 당시부터 명확하지않던 곳이다. 현재 사역으로 추정되는 산199-1번지 일원은 과거 약수터로 이용했다고 하지만 등산로 주변으로 폐타이어와 쓰레기 등이 버려져 있고, 건물지 관련 유구와 유물은 확인되지 않는다. 지형적으로 보아 능선을 등지고 남향하는 평탄지 일원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짐작될 뿐이다.
현재의 지형이 묘역조성 과정에서 많이 변형되고, 산림이 울창해 원지형의 파악도 어려우나, 산 전체의 지형상 소규모 암자가 경영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수습된 불상편과 산포유물을 바탕으로 사찰은 고려후기부터 조선 전기까지 경영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Ο 법장사지
위치 : 강화군 교동면 상룡리 산290
시대 : 미상
고구리 저수지에서 봉소리 방면으로 약 300여 미터를 진행하다 보면 오른쪽으로 들어가는 길이 나온다. 이 길을 따라 가다보면 법장동 마을이 나오는데 이 마을 뒷산에 절터가 자리한다. 현재 수목이 울창하여 절터의 정확한 범위나 위치 확인이 곤란하다.
Ο 화양사지
위치 : 강화군 교동면 지석리 산50
시대 : 고려
교동 북쪽의 지석리 화양골이 있다. 이 곳에 절우물이라고 하는 우물이 있는데, 우물 주변으로 절터가 자리했던 것으로 전한다. 우물의 앞쪽에는 농로가 나 있고 후면은 능선이 펼쳐져 있는데 능선 사면에는 층계 형태로 평탄지가 조성되어 있다. 절터로 추정되는 범위는 대략 사방 50여 미터 정도로 비교적 큰 규모의 사찰 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주민들 전언에 의하면 이곳에 5층 석탑이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 그 위치는 불분명 하다.
Ο 사왕사지(四王寺址)
위치 :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 산36-1번지 일원
시대 : 고려
관청리 산36-1번지 일원으로, 강화산성의 북장대 부근이다. 『강도지』와 『속수증보강도지』에 사찰의 위치가 기록되어 있다. 『강도지』에서는 송악산의 서쪽 산기슭에 있다고 하며, 『속수증보강도지』에서는 북산의 정상부 남쪽에 있고, 그곳을 ‘四王谷’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현재 사역으로 추정되는 곳 일대는 강화산성 주변 정비사업의 일환으로 벌목이 진행되고 있어 사찰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북문에서 북장대로 오르는 성곽 주변으로 전돌편과 어골문 기와편, 청자편, 백자편 등이 확인되지만 사지와 관련된 유물이라고는 추정하기 어렵다.
출처 : 강화의 절터/인천광역시립박물관2009
한국의 사지(폐사지)현황조사보고서(上) / 문화재청.(재)불교문화재연구소 2010
신편강화사2003
사진 : 강화로닷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