Ο 역사의 시작 강화도
하점면에서 쌍날찍개와 내가면 오상리, 양사면 교산리 등에서도 뗀석기가 출토되어 강화의 역사는 곧 한민족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화도면 사기리, 동막리, 여차리 등의 조개무지에서는 신석기 시대의 유물이 수습되었고, 서도면 말도리의 우도에서 수습한 토기에는 볍씨 자국이 남아 있어 강화는 아득한 옛날부터 씨족 단위로 마을을 이루고 농사를 지어 왔음을 알 수 있다.
특히 2010년~2011년 『인화~강화 구간 내 도로의 신설 및 확장공사』에 앞서 (재) 중원문화재연구원에서 조사한 『신봉리·장정리 유적』에서 5~7기의 주거지 군집과 마을이 확인되어 주목을 받고 있다.
강화군의 선사시대 유물 분포 강화는 단군왕검이 하늘에 제사를 올렸다는 참성단을 중심으로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는 삼랑성,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 유물인 고인돌 유적등 고대 한반도의 흔적과 고구려, 백제, 신라, 고려, 조선 그리고 대한민국에 이르기까지 우리 역사의 주요한 무대가 되었다.
또한, 동아시아 문명의 중심통로인 서해는 중국, 일본 등 동남아시아와 한반도 중부를 이어주는 중요한 거점으로 선사시대 이래 강화도는 우리나라 역사의 지붕 없는 박물관이다.
Ο 우리나라의 고인돌
전 세계에 존재하는 약 6만여 기의 고인돌 중 4만여 기가 우리나라에 있다.
중국에는 한반도와 연결된 랴오닌성, 산동성 등에 분포하고 있으며 일본에는 한반도와 마주
보는 규슈지방 등에 분포한다.
한반도의 고인돌은 북한의 대동강 유역과 서해, 남해를 중심으로 흩어져 있으며 강화지역의 고인돌은 남한과 북한 고인돌의 맥을 잇는 역할을, 고창과 화순의 고인돌은 보존상태가 좋고 분포 밀집도가 높은 특징이 있다.
Ο 우리나라에 고인돌이 많은 이유
중국은 벽돌로 쌓은 전탑(塼塔), 일본에는 나무 목탑(木塔)이 많지만 우리나라는 돌로 쌓은 석탑이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것은 탑을 만들 때 벽
돌이나 나무보다 뛰어난 내구성과 정교하고 화려하며 다루기 쉬운 석재가 우리나라에 풍부했기 때문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고인돌이 중국 길림성의 북쪽과 동쪽 등에서 나타나지 않는 것은 이 일대에 고인돌을 제작할 만한 커다란 바위를 찾기 힘들기 때문이며 한반도에 풍부한 질 좋은 석재와 돌을 다루는 기술이 뛰어나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은 고인돌이 축조된 것으로 보고 있다.
Ο 역사에 기록된 고인돌
고려 시대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 돌을 고여 놓았다는 지석(支石)이란 내용이 처음 등장하지만 당시에는 지석을 단순히 돌을 세운 성인들의 기술
로만 표현 하였다.
“다음날 금마군(지금의 전북 익산)으로 향하려 할 때 이른바 지석(받침돌)이란 것을 구경하였다. 지석이란 것은 세속에서 전하기를 옛날 성인이 고여 놓은 것이라 하는데 과연 신기한 기술로서 이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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