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대교 방면으로 부터
1 갑곶돈대(전쟁박물관, 갑곶리탱자나무, 이섭정, 비석군, 금속문진흥비)
강화대교를 지나면서 바로 우회전 이정표를 따라 좌회전 굴다리를 지나면 바로 갑곶돈대와 연결된다. 갑곶돈대는 강화외성과 연결되는 강화 54돈대 중 하나로 김포 성동과 연결되는 강화대교를 품고 있으며 돈대 안에는 옛날 김포, 성동을 통하여 갑곶나루로 왕래하는 사신을 접대하였던 이섭정이 있다.
또한 강화외성을 쌓으면서 적의 침투를 2중으로 방어하기 위하여 탱자나무 울타리를 하였는데 그 중 한그루가 남아 현존한다. 이 탱자나무가 열대성 탱자 나무의 생존 북방한계선이라 하여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돈대 내에는 전쟁 박물관도 있다. 삼국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수 없이 많은 외침을 몸으로 막아낸 슬픈 역사의 현장을 돌아볼 수 있다.
갑곶돈대는 볼것이 많다 봄이면 영산홍이 목련과 어우러져 만발하고 작은 음악회도 열린다.
우측에는 서양보다 200년 앞선 강화의 인쇄술을 기념하는 금속문자 중흥비와 각종 공사 등으로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70기의 강화군 석비를 한곳에 세워놓은 강화 비석군이 있다.
↓갑곶리 탱자나무
↓ 갑곶리 비석군
↓ 전쟁박물관
↓ 이섭정
2. 용진진과 좌강돈대
갑곶돈대에서 다시 나와 시원하게 뚫린 해안도로를 따라 조금 이동하면 도로 우측에 문루가 보인다. 용진진의 문루 참경루(斬鯨樓)이다.
강화도를 방어하는 군사적 요새 중 하나였던 이 곳에서는 약 100여명의 군대가 주둔해 있었으며 가리산돈대 좌강돈대 용당돈대 등 3개의 돈대를 관리하였다. 용진진은 1656년에 축조되었으며 포좌 4문 총좌 26개소의 시설물이 있었던 군사적 요새였다. 참경루와 연결된 둥그런 돈대가 좌강돈대 이다.
3. 용당돈대
용당돈대는 조선 숙종5년 1679년에 강화도 해안방어를 목적으로 쌓은 48개 돈대중 하나로 가리산돈대, 좌강돈대와 함께 용진진에 소속되어 있다.
돈대 평면형태는 타원형이며 북서와 남동방향은 강화외성과 연결되어 있었다. 이 돈대는 4개의 포좌가 설치 되었으며 내부에는 건물지가 남아있다.
용진진에서 멀지 않다. 고개하나를 넘자마자 바로 좌측에 이정표가 있고 주차장은 없으나 1~2대 정도는 주차 가능한 공간이 있다. 주차 후 계단을 따라서 조금 올라가면 시원한 염하와 함께 한눈에 보인다.
4. 화도돈대
돈대는 해안가나 접경 지역에 쌓은 소규모 관측·방어시설이다. 병사들이 돈대 안에서 경계근무를 서며 외적의 척후 활동을 비롯한 각종 수상한 정황을 살피고 대처한다. 적이 침략할 때는 돈대 안에 비치된 무기로 방어전을 펼친다. 1679년 5월에 완성된 48돈대에 이후 5개 돈대가 추가로 지어졌다. 48돈대는 황해도·강원도·함경도 승군 8,900명과 어영청 소속 어영군 4,262명이 80일 정도 걸려서 쌓았다. 돈대 축조를 기획하고 감독한 이는 병조판서 김석주였고 실무 총괄은 강화유수 윤이제였다. 화도돈대는 1679년에 쌓은 48돈대 가운데 하나로 오두돈대·광성돈대와 함께 광성보에 속했다. 원래는 화도보 소속이었으나, 1710년에 화도보가 폐지되면서 광성보의 지휘를 받게 되었다. 방형 구조로 둘레가 129m이다.
5. 오두돈대
오두돈은 해안도로 좌측 봉우리 정상에 위치해 있다. 그 내부는 평탄하며, 전면은 단애로 형성되어 있다. 돈대의 하단에는 조선후기 전성 약 200m 가량 현존한다.
돈대 입구에는 넓은 주차장과 화장실이 구비되어 있고 인근에 도로공원, 음식점들이 있어 관광을 겸한 휴식도 가능하다.
↓ 강화전성
강화외성은 조선 광해군 때부터 숙종대에 이르기 까지 여러 차례 보수하였다. 특히 영조 때에는 강화유수 김시혁(金始爀)의 건의에 의해 1742년부터 1744년까지 오두돈대 주변의 외성을 개축하면서 벽돌을 이용하여 쌓았다. 이 성을 강화전성이라 한다. 현재 오두돈대 주변에는 당시 쌓은 전성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으며, 오두돈대 남쪽의 일부 구간은 현대에 복원되기도 하였다. 강화전성은 수원 화성(사적 제3호)과 더불어 전축성(塼築城)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해 준다.
6. 광성보
광성보는 강화 마니산, 강화고인돌, 전등사, 보문사 다음으로 관광객이 많이 찾는 호국교육의 장이자 관광지 이다.
1745년에 성을 고쳐 쌓으면서 성문을 만들어 안해루(按海樓)라 하였다. 이곳은 1871년 신미양요 때 가장 치열한 격전지였다. 초지진과 덕진진을 거쳐 광성보에 이른 미군은 상륙하기 전에 포격으로 광성보를 초토화했다. 이미 병인양요 때 광성보에 근무한 바 있던 어재연이 포격을 피할 안전한 장소에 군사들을 숨겼다가 상륙하는 미군에 맞서 싸웠다.
조선군은 물러서지 않고 분전했으나 무기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패했다. 병사들 대부분이 전사했으며, 미군은 광성보 전투 후 소득 없이 물러갔다. 미군의 처지에서 볼 때 신미양요는 전투에서 승리하고 전쟁에서 패배한 사건이었다. 광성보 안에는 광성돈대, 어재연·어재순 형제의 충절을 기리는 쌍충비각, 이름을 알 수 없는 전사 장병들을 모신 신미순의총, 손돌목돈대, 용두돈대가 있다.
주차장과 식당 등 관광시설을 모두 갖추고 있다.
↓ 광성돈대
↓ 손돌목돈대
↓ 용두돈대
↓ 신미순의 총
7. 덕진진
↓ 일반인에게 개방한 덕진진 공조루
↓ 덕진돈대 내부
↓ 남장포대
↓ 경고비
8. 초지진
초지진은 조선 후기 서해안으로 침입하는 적을 막기 위해 만든 요새이다. 병자호란 이후 수비체제가 강화도 중심으로 개편되면서 경기 서,남부 해안의 진들이 강화도 일대로 옮겨 왔다. 초지진도 경기도 안산에 있던 수군 기지를 1656년에 이곳으로 옮겨 설치한 것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강화 지역은 1870년대 통상을 요구하며 침략한 열강들과 격렬히 싸웠던 곳이다. 1871년 신미양요 때 전력의 열세로 미군에게 패하여 점령 당하면서 대부분의 시설물이 파괴되었고, 1875년 에는 일본 운요호 사건 때 상륙을 시도하는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운요호 사건을 계기로 1876년 조일수호조규(강화도조약)가 체결되었으며, 이후 우리나라는 주권 상실의 시련을 겪게 되었다.
초지진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허물어져 돈대의 터와 성벽의 기초만 남게 되었다. 이후 1970년대에 돈대를 복원하고 이곳에서 실제로 사용했던 대포를 전시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돈대 옆 소나무에는 1870년대의 전투 중 생긴 것으로 추정되는 포탄의 흔적이 남아 있다.
↓ 전시된 진품대포
↓ 대포 탄흔이 생생히 남아있는 초지진의 소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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