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에 남아있는 고려왕릉

Ο 강화 홍릉

  • 지정번호 : 사적 제224호
  • 소재지 : 인천 강화군 강화읍 국화리 산 180번지

고려 23대 고종(高宗, 1192~1259)의 무덤이다. 『고려사』에 의하면 ‘고종이 1259년(고종 46) 6월 임인일에 재상 유경(柳璥)의 집에서 승하하자, 그 해 9월 기미일에 홍릉에 장례 지냈다.’고 하였다.

원래의 홍릉은 높게 쌓은 3단의 축대로 이루어져 제일 아래에 정자각, 2단에는 사람형상의 돌 조각상, 가장 높은 곳에는 왕릉이 배치된 형식이었다.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으며, 무덤 주위에는 난간으로 두른 돌의 일부가 남아 있었다고 전한다.

무덤의 네모서리에는 짐승을 조각한 돌이 1개씩 배치되어 있었으나 없어졌고, 현재는 사람 모양의 돌조각 2구가 남아있다. 최근에 난간을 보수하고, 봉토 아랫부분에 능을 보호하는 돌을 설치하였다. 고종은 강종(康宗)의 맏아들로 1212년(강종 1) 태자로 책봉되었으며, 어머니는 원덕태후 유씨(元德太后 柳氏)이고, 비는 제21대 희종(熙宗)의 딸인 안혜태후(安惠太后)이다.

46년 간 재위하는 동안 정치적 실권은 무인들이 장악하고 있었으며, 대외적으로도 북방민족이 침입하여 어려움이 계속되었다. 1231년에 몽골이 쳐들어오자 당시의 실력자 최우는 이듬해 서울을 강화로 옮겨 몽골과의 전면 장기전을 채택하여 항쟁하였다.

1259년(고종 46)에 태자[후일의 원종]가 몽골에 가서 강화의 뜻을 표시하고, 항쟁을 단념한다는 표시로 강도의 성곽을 헐어버렸다. 그러나 고종은 이 해에 사망함으로써 강화에 묻혔고, 그 능을 홍릉(洪陵)이라 하였다.


Ο 강화 석릉

  • 지정번호 : 사적 제369호
  • 소재지 : 인천 강화군 양도면 길정리 산 182번지

고려 21대 희종(熙宗, 재위 1204∼1237)의 무덤이다. 『고려사』에 의하면 ‘1237년(고종 24) 8월에 희종이 57세로 법천정사(法天精舍)에서 승하하자 낙진궁(樂眞宮)으로 옮겨졌으며, 10월에 덕정산(德政山) 남쪽 석릉에 장례를 지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희종은 1204년에 신종의 양위를 받아 즉위하였다.

최충헌이 권력을 남용하자 1211년 내시 왕준명(王濬明) 등과 함께 최충헌을 죽이려다가 실패하였다.

이로 인해 최충헌에 의해 폐위당하여 강화로 쫓겨났다가 이어 용유도로, 교동도로 옮겨졌다가 1219년 귀양에서 풀려나 개경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1227년 복위의 음모가 있다는 무고로 다시 강화로 쫓겨났다가 교동으로 옮겨졌고, 법천정사에서 죽었다. 묘역의 하단에는 정자각이 위치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흔적을 확인할 수 없으며, 2단에 1기의 석인상, 봉분 옆에 1기의 석인상이 남아있다.

특히 석릉은 강화에 있는 다른 왕릉과는 달리 봉분 뒤편에 곡장을 두른 것이 특징이다. 조선 현종 때 강화유수 조복양이 강화의 고려 왕릉을 확인하고 보수하였으며, 매년 능참봉을 파견하여 관리하였다고 한다.

1895년 이후 관리가 소홀해졌고 일제 강점기 때에 도굴되어 폐허가 되었던 것을 1974년 보수 정화하였다. 2002년에는 남한에 있는 고려왕릉 최초로 발굴하여 유구를 확인하였고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발굴 당시 청자편을 비롯하여 관장식용 금속류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Ο 강화 가릉

  • 지정번호 : 사적 제370호
  • 소재지 : (23057)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도면 강화남로633번길 16 (능내리)

고려 제24대 원종의 비 순경태후 김씨(順敬太后 金氏)의 무덤이다. 순경태후는 최씨 무인집권자 최우의 사위인 김약선의 딸로서 1235년(고종 22) 원종이 태자가 되자 태자비인 경목현비가 되었으며, 다음해에 충렬왕을 낳고 사망하였다.

1262년(원종 3) 정순왕후로 추대되고 아들인 충렬왕이 즉위(1274)하여 순경태후로 높여졌다. 가릉은 강화에 있는 왕릉과는 달리 지상식 석실 구조를 갖추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현재 석실의 전면에는 유리벽을 설치하여 내부를 볼 수 있도록 되어있다.

일반적으로 봉분 뒤에는 반달 모양으로 두둑하게 토성(土城)을 둘러쌓거나 돌담을 쌓은 곡장이 있으나 가릉에는 사성(莎城), 곡장(曲墻)이 없이 약간 경사진 평지에 봉분을 쌓아 올린 형태이다. 묘역은 3단의 장대석단을 설치한 것으로 보아 고려시대 왕릉의 형태를 갖추었음을 알 수 있다.

봉분이 붕괴되고 석조물은 파괴된 채 폐허가 되었던 것을 1974년 보수하였고, 2004년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발굴한 후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봉분 주변에는 현재 한 쌍의 석수가 있고 봉분 앞에는 석인상 한 쌍이 남아 있을 뿐 석물들이 파괴 또는 유실되어 당시의 모습을 확인할 수 없다.


Ο 강화 곤릉

  • 지정번호 : 사적 제371호
  • 소재지 : 인천 강화군 양도면 길정리 산 75

고려 제22대 강종의 비 원덕태후 유씨(元德太后 柳氏)의 무덤이다. 원덕태후는 종실 신안후(信安候) 성(珹)의 딸로 왕실 동성을 피하기 위하여 유씨라 하였으나 누구의 성을 따랐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유씨는 1212년(강종 1)에 왕비로 봉해졌고 연덕궁주(延德宮主)라 하였으며, 고려 23대 고종의 어머니이다.

이후 원덕태후로 추존되었고, 1253년 정강(靖康)의 시호가 더해졌다. 곤릉은 전체적으로 3단으로 되어 있다. 봉분과 석축, 곡장(曲墻)은 붕괴되고 석조물은 없어진 채 폐허가 된 것을 1974년 보수, 정화하였다. 본래 묘역은 고려 후기의 왕실 묘제를 따라 문·무인석의 석조물이 있었다고 전해지지만 현재는 묘표만 남아 있다. 상단에는 곡장이 파괴되어 없어졌고 그를 대신해서 봉분 뒤에 반달 모양으로 두둑하게 토담을 둘러쌓아 놓았고 그 안에 원형 봉분이 있다.

봉분하단 전면에는 둘레돌이 일부 복원되어 있다. 2단 중앙에는 작은 묘표가 있는데, 묘표에는 ‘고려원덕태후곤릉(高麗元德太后坤陵)’이라 새겨져 있다.

일반적으로 2단에는 석인상이 배치되어 있는데 곤릉에는 석물이 모두 유실되어 흔적을 찾아볼 수 없으며 하단에는 정자각이 위치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자리가 정비되어 있다. 2004년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발굴하였고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 출처 :강화군 / 사진 : 강화로닷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