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가 계속된 전쟁과 기근으로 어려운데도 강화에 돈대墩臺를 축조하게 된 배경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중국 정정의 불안은 곧 조선의 존망과 관련된 문제라고 인식한 숙종은 1678년숙종 4 10월에 병조판서 김석주金錫冑(1634~1684)를 강화도로 보내 진·보를 설치할 곳을 살펴보도록 했다.
이에 김석주가 순찰하고 돌아와서 49개소의 돈대가 적절하니 조속히 축조할 것을 보고하였다.
돈대는 중국 북방에서 사용하던 소규모 군사 기지로 임진왜란 때인 1593년선조 26에 검토를 했지만 많은 병력이 소요되어 포기한 시설이고, 이후 많은 논의를 거쳤던 군사 시설이다. 또 《남한지南漢志》에 “인조 시대에 축성한 남한산성에는 2개소의 돈대가 설치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유적은 전하지 않는다.
숙종은 그해 11월 강화도에 돈대를 설치하기 위해 <강도설돈처소별단>을 반포했는데, 김석주의 시문집인 《식암유고》에 실린 반포 내용을 보면 제1월곶진으로 시작해서 제49휴암돈까지 명칭과 위치 및 형태를 규정해 축조하도록했음을 알 수 있다.
돈대의 성곽을 만들기 위해 그해 12월 1일부터 석재를 채취해 운반하기 시작했으며, 《비변사등록》 기록에 보면 석수가 400여 명, 야장철 다루는 대장장이 50명에다 조역까지 합치면 1,400명이 투입되었다고 했다. 또 돌을 나르는 운석선이 75척으로 각 배의 사공과 격군 2명 등 3명이 투입되었다면 대략 1,635명 이상이 돈대 축조를 위한 사전 석재 공사와 운반에 들어간 것이다.
이후 관용 나룻배 7척이 더 투입되고, 1679년 2월에는 잡물을 실어 나르는 나룻배 2척도 더 투입되었으니 석재를 캐고, 석재 운반과 그에 필요한 잡물을 나르는 배가 84척에 약 1,700명이 동원된 것이다.
1679년숙종 5 1월 13일의 《승정원일기》와 《비변사등록》에 기록된 돈대 축조에 동원된 승군僧軍을 보면 전라도 2,800명, 충청도 1,800명, 강원도 500명, 함경도 400명이며, 경상도는 이미 승군을 동원한 바 있으므로 감해주기를 청하고 2월 26일 경기도 김포 통진현에 모여 점호를 하고, 3월 2일부터 공사에 투입하기로 보고하고 왕의 재가를 받았다.
그리고 2월 27일에는 마니산에서 신에게 고하는 제사를 경관京官이 주관하게 함에 따라 강화유수 윤이제尹以濟, (1628~1701)가 안전 기원을 위한 제사를 지낸 것으로 보이며, 강화유수가 돈대 축조에 관한 모든 현장 작업을 총지휘하게 되었다.
돈대를 완성하고 지은 김석주의 <돈대필축순심후서계>에 의하면 2월 26일 통진현에 실제 모집된 승군은 8,000명이다. 그 외에 석재를 다루는 경석수 570명, 석수 540명 등 총 1,110명이 투입되었으며, 이후 <강도지> 기록에 따르면 승군 900명이 더 증원되어 총 8,900명이 공사에 참여했다고 한다.
3월 6일에는 숙종이 강화 돈대 축조로 고통을 받는 강화백성들에게 쌀 100석과 전포錢布 : 금전 50통을 내린 다음 축조에 참여하는 승군이나 군사, 기술자들이 백성들에게 절대로 해를 입히는 일이 없도록 비망기를 내렸는데, 당시 강화도 백성들은 돈대 축조 공사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논밭의 경작 등에 많은 피해를 입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리고 처음 계획한 대로 49곳을 다 설치한 것이 아니라 제11오두정과 제13광성보 사이에 있는 제12불은평돈대가 제외되어 48개소만 축조했는데, 불은평은 조수가 깊이 들어오는 지역이지만 오두돈대와 광성보 사이가 서로 보이고 평평하기 때문에 제외된 것으로 보인다. 공사는 48곳의 돈대를 4소로 나누어 1소당 12곳을 감독했으며, 축성장으로 동원될 사람이 마땅치 않다며 병조판서 김석주가 시장에 재물을 파는 일로 탄핵당한 전 수군절도사 이세선李世選, (1628~1698) 양우급梁禹及 등을 추천하고 이우李㒖,( ?~1679) 등이 맡았다.
그중 이우의 경우 강화도에서 이유정李有湞,( ?~1679)의 흉서凶書를 전달받아 김석주에게 고변했다가 오히려 축성장에서 파출당하고 고문을 받다 죽었다. 흉서는 “인조의 장남으로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 갔던 소현세자의 손자인 임창군 이혼臨昌君 李焜, (1663~1724)을 왕으로 추대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결국 이혼은 아우인 임성군 이엽臨城君 李煌, (1665~1690)과 함께 제주도로 유배를 가기도 했다.
《비변사등록》 4월 5일자 기록에 의하면 당초 승군 동원은 40일로 기한을 정했지만 공사 기간이 길어지자 왕을 호위하던 어영군 4,262명을 강화 돈대 공사를 주관하는 김석주로 하여금 직접 인솔해서 4월 6일 투입하도록 해 승군 8,900명과 교대하였다. 계룡돈대의 경우 당시 축조한 돈대중 유일하게 석축 하단에 ‘강희18년군위어영축조康熙十八年軍威禦營築造’라는 글이 새겨져 있어 경상도 군위에서 부역할 어영군이 올라와 축조한 것을 알 수 있다.
돈대를 쌓은 후 성문을 달 때는 한양에서 직접 성문을 제작해 운반했는데, 약 7만 근의 주철이 들어갔다. 또 석회 18,000섬, 생칡 880동, 잡목 8,000조 등과 운석선 75척에 관용 나룻배 9척이 동원되었다.
특히 양곡만 12,791섬이 소요되는 대공사로 동원된 인원은 승군 8,900명, 어영군 4,262명, 채석장 약 1,700명, 축성 기술 인원 1,110명 등 직접 공사에 15,972명, 한양의 주물 기술자까지 합하면 약 16,000명 강화산성 남문 이상이 투입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렇게 전국 곳곳에서 많은 인원이 동원되어 완공하기까지는 《강도지》에 80일이 소요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니 3월 3일에 착공해 5월23일 준공되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강화도의 돈대 축조는 채석을 시점으로 본다면 12월 1일부터 5월 23일까지 약 반년에 걸친 대역사인 셈이다.
이후 1690년숙종 16에 48개소이었던 돈대가 1696년숙종22에 49개소로 증가되었는데, 이때 마니산 서쪽 기슭 아래에 있는 검암돈대가 신설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1718년 숙종44 빙현돈대, 1719년숙종 45 철북돈대, 1720년숙종 46 초루돈대가 완성돼 숙종 시대에 총 52개 돈대가 완성되었고, 1726년 영조 2년에 작성돈대가 완성되어 총 53개 돈대가 강화 해안을 지키게 되었다.
그런데 1977년에 강화 중요 국방 유적 복원 정화 사업을 하면서 광성보의 손돌목돈대 아래에 돌출된 지형을 육군박물관팀이 조사할 때 옛 석축이 남아 있어 망루로 보지 않고 돈대로 보면서 이름도 용두돈대라 붙이고, 54개소의 돈대가 강화도에 존재한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출처 : 5000년 역사가 살아숨쉬는 강화/강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