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읍은 고려전기에 강화현에 속하였고 고려 1232년(고종 19) 몽골의 침입으로 개경에서 천도 한후 강도의 소재지였으며 1377년(우왕 강화현이 강화부로 승격된 이후 부치(府治)가 자리하고 있어 조선시대이래 부내면(府內面)이라 칭하다가 1938년 강화군의 이름을 따라 강화면으로 개칭하였고 1973년 7월 1일 강화읍으로 승격되었다.
강화는 강과 연관된 지명으로 강(한강, 임진, 예성)을 끼고 있는 아랫고을이라 강하(江下)라 부르다가 강아래 아름다운 고을이란 뜻으로 강화(江華)로 개명한 듯 하다.
신문리(新門里)
1914년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종래의 부내면의 구촌동(舊村洞), 신촌동(新村洞)에 홍문동(紅門洞)과 종각동(鐘閣洞), 남산동(南山洞), 국정동(國淨洞) 각 일부를 합하고 신촌동에서 신(新)자와 홍문동에서 문(門)자를 따서 신문리라 칭하였다.
남문안(南門內) : 강화산성의 남문 안쪽에 있는 마을이라 남문안이라 부른다.
남산(南山) : 강화부의 남쪽에 있는 산이라 남산으로 부르고 있다.
남산골(南山谷) : 남산 북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라 남산골이라 부른다.
댕댕이 : 옛부터 댕대이 고개가 이마을 중간에 위치하고 있어 댕댕이라고 부른다고 하며 1788년에 세운 대흥정(大興亭)이란 정자가 있던 마을이라 대흥이라 부르기도 한다.
잠두(蠶頭) : 뒷 남산골 동쪽에 있는 누에머리처럼 생긴 산부리에 있는 마을이라 잠두라고 부른다.
관청리(官廳里)
1914년 행정구역 개편할 때 종래의 관청하동(官廳下洞) 부사후동(府司後洞) 동문동(東門洞), 서문동(西門洞), 숙곶동(?串洞)과 홍문동(紅門洞), 종각동(鐘閣洞)의 각 일부를 합하여 조성되었으며 옛부터 각종 관청이 소재하고 있어 관청리라 하였다.
견자산(見子山) : 살채이 북쪽에 있는 산으로 고려 고종이 몽골에 인질로 간 왕자 를 생각하고 자주 이 산에 올라 북녘을 바라보며 아들을 그리워하였다고 하여 견자산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하며 정자산이라고도 한다.
궁골(宮谷) : 서문안 동북쪽에 있는 마을로 조선시대에 수진궁이 이곳에 있어 궁골이라 부른다.
내수골(內需谷) : 동문안 서남쪽 내수사가 있던 마을이라 내수골이라 부르며 내수사는 대궐에서 쓰는 쌀, 베, 잡물과 노비 등에 관한 사무를 맡아보던 기관이다. 현재 경찰서 서편 용흥궁 주변지역이라고 한다.
동문안(東門內) : 강화산성 동문이 있던 안쪽에 있는 마을이라 붙여진 이름이다.
동락천(東洛川) : 시냇물이 강화부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고 있는 내라 동락천이라 한다.
북문고개(北門峴) : 1677년에 축조한 강화산성의 북문이 있는 고개마루라 북문고개라 부르며 대산리와 신당리를 왕래하는 길목이다.
북문안(北門內) : 향교골 동쪽 강화산성 북문 안쪽에 있는 마을이라 북문안이라 부른다.
살채이 : 내수골 동남쪽 견자산 남쪽에 있는 마을로 고려 1389년(공양왕 1) 12월 이성계가 고려 창왕을 신돈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이곳에서 죽였다하여 살창이라 부르다가 살채이로 변하였다.
서문안(西門內) : 강화산성 서문 안쪽에 있는 마을이라 붙인 이름이다.
성마루(城峴) : 동문안 북쪽 마루터기 강화성공회가 있는 위쪽 마을로 조선전기에 쌓은 강화내성이 있어 성마루라 부른다.
토끼다리(兎橋) : 살채이 동남쪽 동락천에 있던 다리로 양쪽에 토끼 모양의 돌이 있어 토끼다리라고 하였다.
왕자정(王子井) : 관청리 산16번지 고려궁지 서편골에 있는 우물로 고려때 궁중에서 먹던 우물이라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운수물 : 강화향교 서쪽에 있는 우물로 여름에는 얼음처럼 차고 겨울에는 따뜻하여 운수물이라 부르는데 운수물에서 유래된 듯 하며 향교에 제사 지낼 때 이 물을 썼다고 한다.
향교골(鄕校谷) : 생굣골, 생굣굴, 향교곡이라 불리운다. 궁골 서북쪽에 있는 마을로 강화 향교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국화리(菊花里)
본래 부내면 지역으로 이곳에 산천이 아름다운 국정동천(國淨洞天)이 있어 국정동이라 부르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국정동과 자연마을인 연화골(蓮花谷)에서 한글자씩 따서 음만 같은 국화리(菊花里)로 명명하였다고 하며 나라 국(國)자를 국화 국(菊)자로 고친 것은 꽃화자에 어울리는 말을 찾아 국(菊)자로 표기한 듯 하다.
국정(國淨) : 예전에 이곳에 산천이 아름다운 국정동천이 있는 마을이라 국정이라 부르고 있다.
고려산 : 오련지 옛날 고려산 정상에 연못이 있어 다섯가지 색깔의 연꽃이 피어 오련지라 불렀다고하며 고구려 416년(장수왕 4) 천축조사가 이곳 연못에서 핀 백련, 청련, 적련, 황련, 흑련 등 다섯가지 연꽃을 날려 떨어진 자리에 연꽃색깔로 백련사, 청련사, 적련사(적석사), 황련사(폐사, 연화동천), 흑련사(폐사, 혈구산 서영 석굴 부근)를 지었다는 전설이 유래되고 있다.
마지터 : 지방돌 북쪽에 있는 작은 마을로 조선시대에 한양에서 교동원(喬桐員)이 부임할 때 아전들이 이곳까지 와서 맞이하였다고 하여 마지터라 부른다.
서문밖(西門外) : 강화산성 서문 밖에 위치한 마을이라 붙인 이름이다.
연지(蓮地) : 국정 동쪽 연화동천이란 경치가 아름다운 골짜기 인근에 있는 마을이라 연지라고 칭하였으며 연화골이라고도 부른다. 지(地)는 지(池)의 오기인 듯 하다. 지방돌 : 이 마을은 고려 고종때 쌓은 강화중성인 토성이 북산에서 승거문쪽으로 연결되어 있었는데 이 성의 경계 및 내역을 돌에 새겨놓은 큰 지석이 있었다는 데서 유래되었다.
진고개 : 지방돌과 서문사이에 있는 고개로 긴고개가 변하여 진고개로 부른 듯 하며 그곳에 있는 마을을 칭하기도 한다.
남산리(南山里)
본래 부내면 지역으로 강화산성 남문밖에서 부조개를 거쳐 선행리 북편 남산 남쪽 기슭에 자리하고 있어 남산리라고 칭한다.
남궁촌(南宮村) : 부조고개 서쪽에 있는 마을로 함열 남궁씨들이 집단으로 세거해온 마을이라 붙여진 이름이다.
남문밖(南門外) : 강화산성 남문 밖에 위치하고 있는 마을이라 남문밖이라 부른다.
문촌말 : 부조고개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 문씨가 많이 살아 문촌말이라 부르며, 문사촌으로도 칭한다.
부조고개(扶助峴) : 남문밖 남쪽에 있는 고개로 고려의 옛신하들이 조선 태조 이성계의 새 정부에 불복하고 이 고개에서 다시는 벼슬하지 않기로 맹서하고 구신골(舊臣谷)로 들어가 살았다는데서 유래되었으며, 처음에는 부조현(不朝峴)이라 하였는데 뒤에 음만 같은 부조현(扶助峴)으로 표기하고 있다.
화성촌(和成村) : 남산 뒷편 중간에 위치하고 있으며 1950년에 마을을 좀더 잘살게 하기 위하여 양계와 축산을 장려하고 생활향상을 도모하여 상, 하 마을이 화합하자는 취지에서 화성 4-H 구락부를 조직 운영 한데서 화성촌으로 부르게 되었다.
갑곶리(甲串里)
본래 장령면 지역으로 강화의 옛 이름인 갑비고차(甲比古次)가 변하여 갑고지 가 갑곶동이 되었다고 전하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장동, 만수동, 묵사동의 각 일부와 부내면의 숙곶동 일부지역을 병합하여 갑곶리가 되었다.
만수동(萬壽洞) : 지금의 당산을 만수산이라고도 부르며 그 아래있는 마을이라 불러온 이름이다.
먹절 : 갑곶진 북쪽에 자리한 마을로 옛날 이곳에 묵왕사(墨王寺)란 절이 있어 묵사동이라 하였는데 지금은 우리말로 풀어서 먹절로 부른다.
알미 : 강화읍 동쪽에 조산(造山)이 있고 조산을 위에서 내려다보면 마치 닭이 알을 품고 있는 모습과 비슷하다고하여 알뫼로 부르다가 알미로 변하였다고 한다.
장동(長洞) : 강화읍내에서 강화대교 방향으로 그리 높지 않은 등성마루에 자리잡은 긴 마을이라 장동이라 한다.
진해부락(鎭海部落) : 당산 동쪽 옛날 진해사란 절 아래에 있는 마을이라 진해부락이라 하였으나 지금은 그곳은 폐동되고 갑곶 구 강화대교 서편마을을 가리킨다.
용정리(龍井里)
원래 장령면 지역으로 예전에 이곳에 용이 승천한 우물이 있다고하여 용정동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용정리라 하였다.
망월(望月) : 양릉 서남쪽에 달맞이 하기가 좋은 등성이가 있어 매년 정월 보름에 달을 보았다고 하며, 그 밑에 있는 마을이라 붙여진 이름이다.
범우리 : 용구물 동쪽에 있는 마을로 고려말 충신 간의대부 범세동(范世東)이 나라의 운명이 다한 것을 보고 이곳에 숨어 후진양성을 하며 여생을 보낸곳이라 하여 범은리(范隱里)라 부르다가 와전되어 범우리가 되었다고하며 일설에는 범옹리(范翁里)가 범어리로 변하였다고도 한다.
양릉(陽陵) : 고려시대 이 마을에 양릉이란 능이 있었다는데서 유래되었으나 문헌상 기록은 확인되지 않았다.
양호(陽虎) : 이 마을에 양릉과 호두산이 있어 머리 글짜를 따서 양호부락이라 부르고 있다.
용구물 : 호두산 서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 용이 승천하였다는 전설이 있는 우물이 있어 용구물이라 부르며 일설에는 마을안의 산이 용의 궁처럼 생겼다하여 용궁물이라 하였으나 와전되어 용구물로 칭한다고도 한다. 진장바위 : 부새산 동북쪽 바닷가에 있는 바위로 김장때가 되면 마을 여러 부녀자들이 모여 김장거리를 씻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옥림리(玉林里)
원래 장령면 지역으로 고려때 사찰 왕림사(旺林寺)가 있어 왕림동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장승동(長承洞), 왕림동과 옥포동(玉浦洞)의 일부 지역을 합하고 옥포와 왕림에서 한글자씩 따서 옥림리라 하였다.
도감골(都監谷) : 옥개 남쪽에 있는 마을로 예전에 이곳에 도감이 설치되어 있었다하여 도감골이라 부르고 있으며 일설에는 도감이란 무과 벼슬을 한 사람이 살아서 도감골이라 칭한다고도 한다.
사왕골(四王谷) : 신왕 서북쪽 북산에 있는 골짜기로 옛날 사왕사가 있던 곳이라하여 사왕골이라 부른다.
신왕(新旺) : 왕리물 서남쪽 길가에 새로 생긴 마을이라 신왕 또는 새말이라 부른다.
왕리물 : 장승말 남쪽에 있는 마을로 예전에 왕림사가 있던 마을이라 왕리물이라 하였으며 왕림말이라고도 부른다.
연비고개(燕飛峴) : 도감골과 장승말 사이에 있는 고개로 뫼뿌리와 고개형상이 제비가 나는 형상이라 붙여진 이름이다.
옥포(玉浦) : 바다물이 돌아 흘러가는 모양을 한 개의 포가 있는 마을이라 옥개라 부른다.
자문이고개(紫門峴) : 도감골과 옥개사이에 있는 고개로 고려 중성의 북동문인 창희문(彰熙門) 일명 자문(紫門)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장승(長承)말 : 도감골 서쪽에 있는 마을로 예전에 이 마을에 장승이 있어 장승말이라고 하였으며 장승배기라고도 부른다.
할미산 : 옥개 뒤에 있는 산으로 산의 모양이 학의 꼬리와 비슷하다고하여 학미산(鶴尾山)이라 하였는데 와전되어 할미산이 부른다고 하며 일설에는 할미등처럼 생긴산이라 할미산이라 칭하기도 한다.
월곶리(月串里)
원래 장령면 지역으로 연미정(燕尾亭)이 있어 연미동이라 하였는데 달뜨는 모습을 이곳 연미정에서 보는 것이 매우 아름다워 달곶 즉 월곶이라 부르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고성동(高城洞)과 옥포동(玉浦洞)의 각 일부 지역을 합하여 월곶리라 하였다.
고성동(高城洞) : 월곶 서북쪽 해안선을 끼고 있는 마을로 고려시대 외성을 쌓을때 이곳 지역을 높게 쌓았다하여 고성동이라 부른다고 한다.
동학골(東學谷) : 대묘골의 동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예전에 동학군이 진을 치고 있었다는데서 유래하였다.
뺄우물(星井) : 대묘골 서남쪽에 있는 약수로 풍병에 효과가 있다고하며 예전에 이곳에 별이 떨어진 자리에 샘이 생겨 우물이 되었다하여 별우물(星井)이라 부르다가 뺄우물로 변하였다.
연미정(燕尾亭) : 월곶 동쪽 바닷가 낮은 산위에 있는 정자로 한강과 임진강의 합수가 이곳에 이르러 양쪽으로 갈라져 서해와 염하가 되는데 그 모양이 제비꼬리 같아 붙여진 이름이다.
월호(月湖) : 월곶리 연미정 아래에 있는 마을로 지형이 둥근달과 비슷하고 호수에 면하고 있어 월호라 칭하였다고 한다.
대산리(大山里)
원래 장령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대묘동(大廟洞)과 소산동(小山洞)에 송정면의 신성동(申城洞) 일부지역을 합하고 대묘동과 소산동에서 한글자씩 따서 대산리라 하였다.
납성개 : 신성포를 한글로 표기한 지명으로 돌모루 서쪽 벌판에 있었던 마을 또는 개이다. 지금은 경지정리로 이주하여 폐동되었다.
대묘동(大廟洞) : 고려 고종때 이마을에 대관전 신격전의 두 태묘가 있었다하여 태묘로 부르다가 후에 대묘로 바뀐데서 유래되었다.
돌모루 : 소산이 북쪽에 있는 마을로 돌이 많은 모퉁이라 돌모루라 칭한다.
석신(石新) :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석우(石隅)와 신성(申城)의 두 마을을 합하여 지은 지명으로 신성의 납신(申)자를 새신(新)자로 음만 따서 표기하고 있다.
소산동(小山洞) : 대산리에서 가장 큰 마을로 작은 산들이 있는 마을이라 소산동으로 칭하며 소산이라고도 한다.
송악골(松岳谷) : 소산이 서남쪽 송악산 즉, 북산밑 골에 있는 마을이라 송악골이라 부른다.
오읍약수(五泣藥水) : 강화산성 북문인 진송루 동쪽 북산 골짜기에 있으며 고려 고종이 강화천도후 내성을 수축할 때 장정들이 목이 말라 애타고 있을 때 갑자기 청천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져 지금의 약수터위 바위가 깨지면서 샘물이 솟아 역군에게 크게 도움을 주었다고하며 오읍은 몽골침입 때에 피해온 실향민들의 향수를 그려 하늘이 울고 땅이 울고 신이 울었는가하면 황제가 울고 온 백성이 울었다는데서 유래되었다.
청송부락(靑松部落) : 북산 너머에 있는 청디물과 송악골을 아울러 이르는 지명으로 산에 노송(老松) 등이 무성한 골에 있는 마을이라 청송부락이라 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