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에 돈대는 도대체 몇 개?
이경수(《강화도史》 저자)
강화에는 보물과도 같은 문화재가 즐비합니다. 저는 그 가운데 돈대에 주목합니다. 사실상 전국에서 강화에만 있습니다. 많아서 더 소중합니다. 하나보다 무리 지어 핀 코스모스가 더 예쁘고 하나보다 함께 어우러져 빛나는 별들이 더 설레는 법입니다. 동서남북 어느 해안에서든 만날 수 있는 돈대는 그래서 강화의 보물입니다. 그런데 돈대에 대한 오해가 적지 않습니다.
자료를 찾다 보면, 이름이 바뀐 경우가 있고 건립된 돈대의 수도 제각각으로 나오고 심지어 건립 연대도 다르게 나오기까지 합니다. 어느 게 맞는 것인지 혼란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돈대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를 정리해보려고 합니다. 우선 다음 글을 읽어보셔요. 공신력 있는 어느 기관 홈페이지에 ‘선수돈대’를 소개한 글입니다. 미리 말씀드리는데 모두 오류입니다. 문제는 이글이 인터넷상에 널리 퍼져있고 심지어 백과사전에도 그대로 실려 있다는 점입니다.
“이 돈대는 당시 병조판서를 지내던 김석주의 명을 받아 쌓은 49돈대 중 하나로, ‘송강돈대’라고도 불리운다. … 남쪽으로는 검암돈대가 있고, 북쪽으로는 굴암돈대가 있는데, … 조선 숙종 5년(1679)에 축조된 것으로, 강화유수 윤이제가 어영군을 동원하여 쌓았다.” 처음 쌓은 돈대는 49개가 아니고 48개입니다. 선수돈대를 송강돈대와 같은 것으로 설명했지만, 두 돈대는 전혀 다른 돈대입니다. 선수돈대 남쪽에 검암돈대가 있다고 했는데 이것도 오류입니다. 검암돈대는 선수돈대의 원래 이름입니다.
즉 검암돈대와 선수돈대는 똑같은 것입니다. 선수돈대 북쪽에 송강돈대가 있고 송강돈대 북쪽에 굴암돈대가 있습니다. 또 선수돈대는 숙종 5년(1679)에 세운 것이 아닙니다. 그 이후에 세웁니다. ‘강화유수 윤이제가 어영군을 동원하여 쌓았다.’는 표현도 틀렸다고 하기는 좀 뭐한데, 아무튼 적절한 내용이 아닙니다.이제 강화의 돈대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고려는 몽골의 침략에 대항하려고 강화로 천도했습니다. 수십 년의 항쟁 기간 동안 몽골은 한 번도 강화를 공격하지 못했습니다. 바다를 몹시 부담스러워 했습니다. 조선은 고려의 경험을 그대로 배웠습니다. 몽골과 같은 유목민족인 여진족의 침략 때 강화로 조정을 옮겼지요. 그때 여진족의 나라는 후금이었고, 그들의 침략을 정묘호란이라고 합니다. 강화로 피난한 덕에 인조 임금과 조정은 무사했습니다. 두 나라는 곧 화의를 맺고 전쟁을 끝냅니다.
강화가 영원한 철옹성일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아니었습니다. 후금이 나라 이름을 청으로 바꾸고 쳐들어온 전쟁, 즉 병자호란 때 강화가 함락되고 말았습니다. 이후 조선의 왕들은 섬이라는 강화의 자연조건만으로는 외적의 침략을 막기 어렵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방어시설을 강화하는 데 신경을 쓰게 됩니다. 왜 그랬을까요. 앞으로 외침이 또 있을 때, 한양 방어가 어려워질 때 다시 강화로 피난하려고 미리 준비했던 것입니다. 강화의 방어시설 구축에 가장 공을 들인 이가 숙종 임금입니다.
강화산성을 쌓게 한 이가 숙종이고 김포 문수산성을 쌓게 한 이도 숙종입니다(문수산성은 한양 방어가 아니라 강화를 지키려고 쌓은 것입니다). 강화의 돈대들도 대부분 숙종 때 쌓은 것입니다. 숙종은 자신의 오른팔과도 같은 병조판서 김석주를 강화에 직접 보냅니다. 김석주는 강화 곳곳을 돌아보고 지도까지 그려서 돈대 쌓을 49곳을 임금에게 보고합니다. 일단 계획은 49개 돈대를 쌓는 것입니다.
국가적인 대사업으로 공사가 시작됩니다. 돈대 축조 공사는 1679년(숙종 5) 3월 초에 본격적으로 시작돼서 5월 말에 끝납니다. 공사 전반기에는 황해도·강원도·함경도에서 징발된 승군 8,900명 정도가 각지에 돈대를 쌓았습니다. 후반기에는 어영군 소속 군사 4,200여 명이 투입되어 공사를 마무리합니다. 이때 쌓은 돈대는 49개가 아닌 48개입니다. 한 곳은 쌓지 못했습니다.
쌓지 못한 돈대는 오두돈대와 광성돈대 사이 불은평에 세우려고 했던 것입니다. 불은평은 지대가 낮아 바닷물 드나드는 갯골을 메우면서 돌을 쌓아 올려야 했습니다. 다른 곳보다 공력이 아주 많이 드는 곳이라 어쩔 수 없이 포기했던 것 같습니다. 아무튼 1679년(숙종 5)에 쌓은 돈대는 48개입니다. 돈대 쌓는 총책임자는 김석주입니다.
현장에서 실무를 책임진 사람은, 승려들이 일하던 전반기에는 강화유수 윤이제였습니다. 어영군이 들어온 후반기에는 윤이제 아닌 다른 사람이 현장 지휘를 맡게 됩니다. 그래서 윤이제가 어영군을 동원해서 돈대를 쌓았다는 표현은 적절한 것이 아닙니다. 이후 돈대 몇 개가 추가로 세워집니다. 우선 쌓은 연대가 명확하지 않은 검암돈대(선수돈대)가 들어서고 이어서 빙현돈대(1718, 숙종 44), 철북돈대(1719, 숙종 45), 초루돈대(1720, 숙종 46)를 쌓았습니다. 여기까지 하면, 숙종 때 쌓은 돈대는 모두 52개가 됩니다. 영조 임금도 강화에 돈대 하나를 쌓게 합니다.
1726년(영조 2)에 쌓은 작성돈대입니다. 그러면 53개가 되지요. 선수돈대 즉 검암돈대를 쌓은 해가 언제인지 기록이 없어서 알 수 없지만, 대략적인 시기를 추정할 수 있습니다. 배성수의 연구(2002)에 의하면, 검암돈대는 1690년(숙종 16)부터 1696년(숙종 22) 사이 어느 해인가에 세워진 것 같습니다. 이런 추정이 가능한 것은 다음과 같은 옛 기록 덕분입니다.
‘강도의 바닷가에 있는 돈대는 마흔여덟인데…’라는 1690년의 《숙종실록》 기사. 그리고 ‘기미년(1679)에 … 48처의 돈(墩)을 쌓았고, 그 뒤에 1돈을 더 쌓았다.’라는 1696년에 이형상이 쓴 《강도지》의 기록. 1690년까지는 여전히 48개이고 1696년 현재 하나가 늘어서 49개가 됐으니 검암돈대는 그사이에 세워졌을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자, 그럼 여기까지 다시 한번 정리해볼게요. 숙종 초반의 48돈대, 숙종 후반의 검암돈대·빙현돈대·철북돈대·초루돈대 이렇게 4돈대 그리고 영조 초에 세운 작성돈대, 모두 합하면 53돈대가 됩니다. 이게 끝일까. 아닙니다. 고종 때 쌓은 용두돈대가 하나 더 있습니다. 다른 돈대들과 달리 용두돈대는 옛 문자 기록에 그 이름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대신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지도들에 ‘용두돈’이라는 이름이 보입니다.
잘 알려진 김노진의 《강화부지》 말고 또 다른 《강화부지》가 규장각에 있습니다. 아직 번역되지는 않았습니다. 그 책에 1867년(고종 4)에 용두돈대를 쌓았음을 추정하게 하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래서 조선시대에 강화에 세워진 돈대는, 숙종 때 52개, 영조 때 1개, 고종 때 1개. 모두 합해서 54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