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행 팁 –
볼음도와 주문도 아차도는 강화군에 속한 외딴 섬으로 외포리 선착장에서 1시간 30분 정도 카페리를 이용하여 여행할 수 있었던 것을 2021년 3월 1일 서도면 분리 · 단축항로의 개설 및 운항횟수 증가로 보다 더 쉽게 여행할 수 있게됐다.
따라서 기존 외포항에서 출항하던 여객선은 화도면 선수항에서 주문도와 볼음도를 각각 1일 3회 운항하고 시간도주문도는 35분, 볼음도는 1시간 5분으로 대폭 단축되었다. 운항 요금은 이전과 변동 없다.
숙박은 민박 또는 해수욕장에서 천막을 이용해야 하며 섬에는 대중교통이 없고 일반 음식점들이 발달하지 않아 여행계획을 특별히 고려해야 한다. 한시적으로 운영하는 음식점이 1~2곳 있기 때문이다.
가 볼만한 곳 : 주문도 뒷장술 해수욕장 (상합 등 조개캐기 / 민박집과 사전협의)
선착장 주변 : 망둥이 낚시
주문도길 걷기 : 약 11Km 3시간 정도 소요
볼음도릴 걷기 : 약 14Km 3시간30분 정도 소요
볼음도 영뜰 해수욕장
출발 전 삼보해운 전화 확인 필수 932-932-6619
삼보해운 홈페이지 : http://www.kangwha-sambo.co.kr/
민박 문의 : 서도면사무소 032-930-4520
볼음도
강화군 서도면에서 가장 큰 섬(6.6㎢)으로 고려 때는 파음도(巴音島)라 하였고 조선 인조 때 명나라로 가던 임경업(林慶業) 장군이 풍랑을 만나 이곳에 체류하던 중 보름달을 보았다 하여 만월도(滿月島)라고 하다가 이후 보름달의 발음을 따서 보음도(甫音島)또는 볼음도라고 하였으며 지금도 임경업에게 제사를 지냈던 당집이 현존한다.
강화 본도에서 서쪽으로 약 7㎞, 황해도의 연백군(延白郡)과 약 5.5㎞ 떨어진 서해 최북단에 위치하고 북쪽 해안선은 NLL의 남방한계선을 이룬다. 1896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교동군에 속하였다가 1915년 경기도 강화군 부속도서로 편입되었다. 1962년 볼음 출장소가 설치되었고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분교 1개교 중학교 1개교가 있다.
1995년 인천광역시에 편입되었다.
1935년경부터 1945년 해방 때 까지 일본의 고주파 철광회사가 철광석 및 중석 광산을 개발하였으나 현재는 휴광 중이다.
한국 광무연감에 의하면 이곳 철광석 매장량은 약 100만 톤, 중석이 약 50만 톤 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이곳 철광석은 크롬철이라고 한다. 1960년대에 인천제철에서 시험했으나 용해가 여의치 않았다고 하며 최근 포항종합제철에서 시험한 바로는 용해가 가능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중석광도 해방이후 휴광상태에 있다가 1965년 1년 동안 원시적인 방법으로 소량을 채광 했을 뿐인데 흑중석·희중석 두 가지가 채광된다.
국내에서 크롬광으로 개발된 광상은 함경북도 부령군 연천면에 있는 광상뿐이다. 이 광상은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 개발되어 약 1천 톤의 광석을 생산한 바 있다. 이 광상은 사문암체(蛇紋岩體)내에 괴상으로 배태된 마그마광상이다. 이밖에 크롬철석의 국내산지로는 황해도 장연군 용연면·경기도 강화군 서도면 볼음도·함경북도 부령군 청암면 등 몇 곳이 알려져 있다.
천연기념물304호(1982. 11. 4일지정) 강화볼음도은행나무가 서도면 볼음도리 산186번지에 있다.
북쪽에 봉화산(83m) 서쪽에 요옥산(103m)이 있으며 그 사이의 지역이 낮고 편평하여 취락이 형성되었으며 동쪽으로는 주문도리·아차도리와 마주하며, 서쪽으로 말도리와 마주하며 남쪽으로는 서해 바다와 북쪽으로는 삼산면 서검도와 마주한다. 볼음도리에는 1리에 당하촌(堂下村) 죽하촌(竹下村) 간촌(間村)과 2리에 내촌(內村) 등 4개의 자연부락에 주민들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하며 논 152ha(약46만평) 밭 64ha(19만2000평) 임야 374.7ha의 농토에서 쌀·보리·마늘·고추 등을 생산한다.
특히 노랑부리백로·저어새 등 20여 종의 철새들이 먹이를 찾아 갯벌로 모여든다. 그밖에 자연학습장으로 활용되는 영뜰해변, 조개를 채취할 수 있는 조개골해수욕장, 강화 볼음도은행나무 등이 유명하다.
주문도
주문도리는 4.626㎢의 면적과 역삼각형의 해안선 길이는 12.6㎞로 조선시대 후기에 임경업(林慶業)장군이 중국에 사신으로 갈 때 이 섬에서 한양에 있는 국왕에게 하직하는 글을 올렸다 하여 아뢰올 주(奏), 글월문(文)을 써서 주문도(奏文島)라 하였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와전되어 주문도(注文島)라 불려 졌다는 설과 중국 사신들이 중국을 왕래할 때 임금에게 중간 보고의 글을 올렸다고 하여 물가를 뜻하는 삼수(氵)변에 임금 주(主)자를 합한 주(注)자와 글월문(文)자를 써서 주문도(注文島)라 부른다는 지명에 관한 2가지의 설이 전해내려 오고 있다.
주문도의 최고봉인 봉구산(烽丘山/147m)과 105m의 구릉지가 섬의 중앙부에 있으며, 남동쪽과 북서쪽에 비교적 넓은 평지가 발달하여 농경지가 넓게 분포한다. 동쪽 해안에 둥글고 완만한 만이 형성되어 있으며 해안선은 매우 단조롭다.
북동쪽과 남동쪽 돌출부는 암석 해안으로 해식애(암석 낭떠러지)가 발달해 있으나, 대부분의 해안은 간석지가 넓게 펼쳐져 있으며, 섬의 북서쪽은 간척되어 농경지로 변모 되었다.
섬의 중심부 봉구산 남사면 진말과 북쪽 해안의 느리·대빈창 마을에 취락이 형성되어 있고 주민의 대부분이 농업과 어업에 종사하며 농산물로는 쌀·콩·고구마·고추·마늘 등이며 최근에는 인삼 재배도 활발하다. 연근해에서는 숭어·꽃게·병어·새우·농어·준치·삼치 등이 잡힌다.
1923년에 건설된 강화서도중앙교회는 인천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4호로 지정되었으며 강화본도 선수항에서 정기 여객선이 1일 3회 왕복 운항 된다. 면사무소·보건지소·경찰지서·우체국·농업협동조합 등이 있으며 교육기관으로 초등학교와 중학교 고등학교가 통합된 1개 교가 있다.
『강도지』에 따르면 “매도(煤島)의 서쪽 7리(里)에 있으며 수로(水路)로는 75리 거주민은 10호이다. 옛날에는 정포영(井浦營)과 둔전(屯田)이 있었고 지금은 목장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대동여지도』와 『조선지지자료』등 에서도 지명이 확인된다. 『조선지지자료』에서는 섬 안에 봉대산(峯坮山)이 있고 대빈창들 느리들 등 비교적 넓은 들판이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서도면의 4개 도서 중 가장 동편에 위치한 서도면의 면소재지로 동쪽으로는 바다를 사이에 두고 화도면 장화리와 서쪽으로는 볼음도와 남쪽으로는 서해 바다이고, 북쪽으로는 아차도와 마주한다.
중앙부에 위치한 봉구재산 수리봉 등 150m가 채 넘지 않는 야트막한 산 주변부에 사방으로 주거지역이 형성되어 있으며 수군․첨사진이 있었던 곳이다
주문 웅구지는 어류 집산지로 이름이 높았다 하나 현재는 미약하다.
어자원이 감소되면서 수산업이 축소되고 농업이 주된 산업이다. 해상 교통이 편리해지면서 외부 관광객이 증가하는 추세에 있고, 주문항에는 15척의 어선이 있어 인근해역을 기반으로 비교적 활발한 어업활동이 이루어지고 있다.
아차도
서도면 주문도에 붙어있는 작은 섬이라는 뜻에서 조선 초기에는 소도(少島)라고 불렀으며 조선중기 이후 으뜸 섬(주무도)이 있고, 그 보다 작은 섬이란 뜻에서 아차도(阿次島)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대동여지도』에 주문도와 석모로도 사이에 아차도(阿此島)라는 지명이 확인되고 있으며 『1872년 지방지도』「인천부」편에 표기된 소도(小島)는 이 섬과는 다른 섬으로 추정하고 있다. 『조선지지자료』에 지명이 확인되며 섬 안에 해룡산(海龍山)이 소재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유래에 의하면 “육지와 바다에서 각각 천 년씩 보낸 이무기가 용이 되어 승천하다가 임신한 여자를 보고 아차 하는 순간에 바다로 떨어져서 아차도가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종전의 제도인 아차도는 아차도리가 되어 신설된 서도면에 속하게 되었다.
서도면의 중앙에 위치한 섬으로 동쪽으로는 석모도와 마주하고, 서쪽으로는 볼음도리와 마주하며, 남쪽으로 주문도리와 마주한다. 북쪽으로는 삼산면 서검도와 마주한다.
가옥이 25호 밖에 되지 않고 마을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을 정도로 아주 작은 섬. 아차도리에서의 농·어업은 주로 자급자족을 위하여 이루어지고 있다.
아차항에는 8척의 어선이 있으며, 농경지가 매우 적은 이 마을에서는 어업이 주업이다.
강화본도 선수항에서 하루 3회 여객선으로 입도할 수 있다.
말도
섬의 위치가 강화해역의 끝에 있다고 하여 옛 부터 끝섬 또는 말도리라 부르는 이 섬은 면적 144ha(43만2천평) 해안선길이 6.1㎞이다. 2021년 현재 14세대에 20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신중동국여지승람부/1530년』에는 “보름도의 서쪽 5리(里)에 있는데 주위가 43리(里)라”고 되어있다.
인천에서 북서쪽으로 45㎞, 황해도 연백군 해성반도(海城半島)에서 남쪽으로 7㎞해상에 위치하며, 교동도(喬桐島)·볼음도(乶音島)·주문도(注文島)와 근접한다. 서도면 맨 끝에 있는데다 옛날 이 섬의 관청 보고가 항상 늦어 꾸지람을 많이 들었기에 ‘끝 말(末)’ 자에 ‘꾸짖을 질(叱)’ 자를 붙여서 唜島(말도)라 하였다고 한다.
윤두서(尹斗緖)의『동국여지도(東國輿地圖)』에는 말도(末島)가 아닌 말점(末占)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세종실록(世宗實錄)』〈지리지〉강화도호부(江華都護府)편에는 한자상의 표기를 달리하여 “말도(末島)는 둘레가 10여리(里)인데 교동 사람들이 왕래하며 농사를 짓는다.”고 기술되어 있다. 1914년 3월 1일 서도면(西島面)에 편입되었으며 1962년 10월 1일 볼음출장소 관할이 되었다.
해안은 암석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북부 중앙 말도만의 기항지(寄港地)이나 간석지가 드러나서 배의 출입이 불편하다. 구릉의 기복이 심하고 경지가 적어 주민은 반농 반어의 생활을 하였으나 현재는 주로 농업에만 의존하고 있다.
강화 목장에서는 양(羊)도 사육하였는데, 언제부터 양을 기르기 시작 하였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783년(정조 7)에 쓰인『강화부지』에 따르면 강화의 동검도 보을음도(볼음도) 말질도(말도)에서 양(羊)을 길렀음이 확인된다. 또한 1864년(고종1)에도 말도목장에서 양을 사육하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것을 볼 때 강화에서는 조선후기까지 양을 길렀다고 볼 수 있다.
말도는 민통선 지역으로 지역주민 이외 허가 없이 입도 할 수없다.
< 강화로닷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