Ο 강화 삼랑성
- 지정 : 사적
- 소재지 :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산42번지
단군의 세 아들이 성을 쌓았다고 해서 삼랑성(三郞城)이라고 부른다. 마니산 참성단과 더불어 단군과 연관된 이야기가 기록으로 전해지는 귀한 역사 유적이다.
『고려사』와 『세종실록지리지』에 단군의 세 아들이 삼랑성을 쌓은 것으로 전해진다는 기록이 있다. 정족산성(鼎足山城)이라고도 하는데 성의 둘레는 대략 2,300m이다. 축성 연대를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거친 할석(割石)을 사용한 삼국시대의 축성 기법이 드러나는 것으로 보아 삼국시대에 쌓은 성으로 추정한다. 1739년(영조 15)에 중수하면서, 남문에 문루를 건립하고 종해루(宗海樓)라 하였고, 1764년(영조 40) 다시 성을 중수하였다.
1866년(고종 3) 병인양요 때 양헌수 부대가 동문과 남문으로 공격해오던 프랑스군을 물리친 승전지이다. 삼랑성 안에는 삼국시대에 창건된 전등사가 있다. 고려 대몽항쟁기에 성 안에 가궐(假闕)을 지었는데 터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조선시대 후반 정족산 사고를 짓고 조선왕조실록과 왕실의 족보인 선원록 등을 봉안했으며, 군사 시설로 정족진을 설치했었다.
Ο 강화산성
- 지정 : 사적
- 소재지 : 강화군 강화읍 국화리 산3번지 일원
고려시대 몽골의 침입에 대항하기 위해 1232년(고종 19) 강화로 수도를 옮겼을 때 처음 성을 쌓았는데, 그 때는 지금보다 규모가 작았다. 조선 전기에 개축하였는데, 1637년 병자호란 때 청군에 의해 파괴되었다. 숙종 때 전면적으로 성을 보수하면서 동락천 건너 남산까지 포함시켜 크게 확대하였다.
북산, 남산, 견자산으로 이어진 포곡식 산성으로 둘레가 7,122m이다. 4개의 대문, 4개의 암문(暗門), 2개의 수문(水門)이 있고, 북산과 남산 정상에 관측소이자 지휘소인 북장대, 남장대가 있었다. 장인대(丈人臺)라고도 불린 남장대는 1745년(영조 21) 강화유수 황경원이 세웠는데, 2010년에 복원되었다. 4대문 가운데 북문에는 원래 누각이 없었는데 1783년(정조 7) 강화유수 김노진이 누각을 올려 온전한 형태를 갖췄다고 한다.
남문은 1955년에 문루가 무너졌는데 1975년에 복원했고, 당시 국무총리였던 김종필이 ‘江都南門’ 편액을 썼다. 2003년 동문이 새로 세워지면서 모든 성문이 복원됐다. 동문은 망한루(望漢樓), 서문은 첨화루(瞻華樓), 남문은 안파루(晏波樓), 북문은 진송루(鎭松樓)이다.
성의 동쪽 부분은 많이 없어졌으나, 남쪽, 북쪽과 서쪽의 산자락 부분은 비교적 보존상태가 좋다. 조선 후기 병인양요 때 프랑스 군이 들어왔고, 강화도 조약을 맺을 때 일본군이 들어오는 등 역사적 사건의 현장이었다.
Ο 강화 고려궁지
- 지정 : 사적
- 소재지 : 강화군 강화읍 북문길 42 (관청리)
- 입장료/요금 : 무료
- 개방시간 : 09:00∼18:00
- 휴관일 : 연중무휴
- 관람소요시간 : 20분
- 주차정보 : 무료주차 15대
- 주요시설 : 명위헌, 이방청, 종각
- 편의시설 : 화장실
- 문의처 : 032-930-7078
고려가 몽골군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하여 도읍을 개경에서 강화로 옮긴 1232년(고종 19)부터 다시 환도한 1270년(원종 11)까지 38년간 사용되던 고려궁궐터이다. 『고려사절요』에 의하면, 최우(崔瑀)가 군대를 동원하여 이곳에 궁궐을 지었다고 한다.
비록 규모는 작았으나 송도 궁궐과 비슷하게 만들고 궁궐의 뒷산 이름도 송악(松岳)이라 하였다고 한다. 강화도에는 정궁(正宮) 이외에도 행궁(行宮)·이궁(離宮)·가궐(假闕) 등 많은 궁궐이 있었는데, 이곳 강화읍 관청리 부근은 정궁이 있었던 터로 추정된다. 정문의 이름은 승평문(昇平門)이었고, 양측에 삼층으로 된 두 개의 대문이 있었으며 동쪽에 광화문(廣化門)이 있었다.
승평문의 위치는 현재보다 100여m 남쪽인 용흥궁 입구 부분에 위치했다고 전한다. 강화의 고려 궁궐은 1270년 송도로 환도할 때에 몽골의 압력으로 모두 허물어졌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고려 궁궐터에는 강화의 지방 행정관서와 궁궐 건물이 자리를 잡았다. 강화의 궁궐은 행궁과 장녕전, 만녕전, 외규장각 등이 있었으나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에 의해 불타 없어졌다.
지금은 강화유수가 업무를 보던 동헌과 유수부의 경력이 업무를 보던 이방청 등 조선시대 유적만 남아있다.
Ο 강화 참성단
- 지정 : 사적
- 소재지 : 강화군 화도면 흥왕리 산 42-1번지
마니산 정상에 있으며 단군이 하늘에 제사를 올린 제단이라고 전해온다. 고려 원종 11년(1270)에 보수했으며, 조선 인조 17년(1639)과 숙종 26년(1700)에도 고쳐 쌓았다. 여러 번 고쳐서 쌓았기 때문에 최초의 모습은 찾아보기는 어렵다.
제단은 자연석으로 둥글게 쌓은 하단(下壇)과 네모반듯하게 쌓은 상단(上壇)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둥근 하단은 하늘, 네모난 상단은 땅을 상징한다고 한다. 이런 모습은 경주의 첨성대와 비슷하다. 고려와 조선왕조는 때때로 이곳에서 도교식 제사를 거행하기도 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단군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참성단을 단군시대의 종교와 관련시켜 이해하는 경향이 나타났는데, 일제강점기에 단군을 숭배하는 대종교(大倧敎)가 생기고 난 이후에는 민족의 성지로서 주목받게 되었다. 지금도 해마다 개천절에 제천행사가 거행되며, 전국체전의 성화는 이곳에서 태양열을 이용하여 붙이고 있다.
참성단이 과연 단군의 제천단인지는 단정할 수 없으나, 고려시대에 국가제사를 지내는 곳이었던 만큼 제전(祭田)이 지급된 것은 물론이다. 고려 원종은 참성단의 의례를 직접 주재하기도 하였다.
Ο 강화 부근리 지석묘(고인돌)
- 지정 : 사적
- 소재지 : 강화군 하점면 부근리 317번지
지석묘란 청동기시대 사람들이 만든 무덤으로 고인돌이라고도 한다. 지상에 책상처럼 세운 탁자식(북방식)과 큰 돌을 조그만 받침돌로 고이거나 판석만을 놓은 바둑판식(남방식)이 있다.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고인돌이 전국에 걸쳐 분포해 있다.
무게가 수십 톤 이상인 덮개돌을 채석하여 운반하고 무덤에 설치하기까지에는 많은 인력이 필요하였다. 따라서 고인돌은 당시 지배층의 정치권력과 경제력을 상징하는 청동기시대 대표적인 유적이다. 강화군에서 고인돌이 가장 많이 분포하고 있는 지역이 하점면과 양사면으로 이 일대에는 40여 기의 고인돌이 있다. 부근리 일대에는 이밖에도 탁자식 고인돌과 바둑판식 고인돌이 여러 기 남아 있다.
부근리에 있는 고인돌은 아직 발굴조사를 하지 않아 고인돌과 관련된 유물은 어떤 것이 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인근에 있는 하점면 삼거리 유적에서 탁자식 고인돌 무덤 5기를 발굴하여 돌방[석실(石室)]안에서 민무늬토기 조각, 간돌칼[마제석검(磨製石劍)], 돌가락바퀴[방추차(紡錘車)], 달도끼[환상석부(環狀石斧)] 조각 등이 나온 적이 있고 고인돌 언저리에서 빗살무늬토기들이 여러 점 나온 것이 있다.
따라서 부근리 고인돌에도 삼거리 유적과 비슷한 유물들이 들어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강화 부근리 지석묘는 주변의 여러 고인돌과 함께 2000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Ο 강화 홍릉
- 지정 : 사적
- 관람소요시간 : 50분
- 주차정보 : 국화리 청소년야영장 내
- 소재지 : 강화군 강화읍 국화리 산 180번지
고려 23대 고종(高宗, 1192~1259)의 무덤이다. 『고려사』에 의하면 ‘고종이 1259년(고종 46) 6월 임인일에 재상 유경(柳璥)의 집에서 승하하자, 그 해 9월 기미일에 홍릉에 장례 지냈다.’고 하였다.
원래의 홍릉은 높게 쌓은 3단의 축대로 이루어져 제일 아래에 정자각, 2단에는 사람형상의 돌 조각상, 가장 높은 곳에는 왕릉이 배치된 형식이었다.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으며, 무덤 주위에는 난간으로 두른 돌의 일부가 남아 있었다고 전한다.
무덤의 네모서리에는 짐승을 조각한 돌이 1개씩 배치되어 있었으나 없어졌고, 현재는 사람 모양의 돌조각 2구가 남아있다. 최근에 난간을 보수하고, 봉토 아랫부분에 능을 보호하는 돌을 설치하였다. 고종은 강종(康宗)의 맏아들로 1212년(강종 1) 태자로 책봉되었으며, 어머니는 원덕태후 유씨(元德太后 柳氏)이고, 비는 제21대 희종(熙宗)의 딸인 안혜태후(安惠太后)이다.
46년 간 재위하는 동안 정치적 실권은 무인들이 장악하고 있었으며, 대외적으로도 북방민족이 침입하여 어려움이 계속되었다. 1231년에 몽골이 쳐들어오자 당시의 실력자 최우는 이듬해 서울을 강화로 옮겨 몽골과의 전면 장기전을 채택하여 항쟁하였다.
1259년(고종 46)에 태자[후일의 원종]가 몽골에 가서 강화의 뜻을 표시하고, 항쟁을 단념한다는 표시로 강도의 성곽을 헐어버렸다. 그러나 고종은 이 해에 사망함으로써 강화에 묻혔고, 그 능을 홍릉(洪陵)이라 하였다.
Ο 강화 초지진
- 지정 : 사적
- 입장료/요금 : 무료
- 개방시간 : 1,2,11,12월 (09:00∼17:00) / 3,4,9,10월 (09:00 ~ 18:00) / 5,6,7,8월 (09:00∼19:00)
- 휴관일 : 연중무휴
- 관람소요시간 : 15분
- 주차정보 : 대형 40대
- 편의시설 : 화장실, 매점, 휴식공간
- 소재지 : 강화군 길상면 해안동로 58
강화의 해안 경계 부대인 12진보 가운데 하나이다.
병자호란 이후 서해안 수비체제가 강화도 중심으로 개편되면서 경기 서남부 해안의 진(鎭)들이 강화도와 강화도 근처로 옮겨오게 된다.
1655년(효종 6)에 남양의 영종진이 인천부 자연도로 옮겨왔다. 영종진이 자연도에 자리 잡으면서 섬의 이름도 영종도로 바뀌게 된다. 영종진을 남양에서 자연도로 옮긴 것은 자연도가 해상에서 강화도로 진입하는 길목이라는 중요성 때문이다. 이제 영종도는 강화도를 지키는 1차 방어선의 기능을 하게 되었다.
초지진은 1656년(효종 7)에 안산에서 옮겨왔다. 초지진에서 초지돈대·장자평돈대·섬암돈대를 맡아 지휘했다. 1871년(고종 8) 신미양요 때 미군과 충돌했던 격전지이다. 1875년(고종 12) 일본 운요호 사건 때 상륙을 시도하는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인 곳이기도 하다.
당시 초지진을 지키던 조선군은 일본군을 격퇴했다. 패퇴한 일본군은 철수하면서 영종도를 해코지했다. 이후 초지진은 허물어졌고, 초지진이 관할했던 초지돈대만 남았다.
정비된 초지돈대 안에는 대포가 전시돼 있다. 돈대 옆 소나무에는 신미양요 혹은 운요호 사건 때 포탄 맞은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Ο 강화 덕진진
- 지정 : 사적
- 입장료/요금 : 무료
- 개방시간 : 관람시간 : 09:00∼18:00
- 휴관일 : 연중무휴
- 관람소요시간 : 30분
- 주차정보 : 버스 10대, 소형 10대
- 편의시설 : 화장실
- 소재지 :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 846
- 문의처 : (032)930-7074,5
원래 덕포진이 강화에 있었는데 1666년(현종 7)에 통진(지금 김포시 대곶면)으로 옮겼다. 그 자리에 덕진진이 설치됐다.
덕진진은 손돌목돈대와 덕진돈대를 관할했다. 숙종 대에 이곳에 덕진정사라는 행궁을 지었다. 이후 행궁이 읍내에 새로 건립되면서 덕진정사는 폐지됐다.
1866년(고종 3) 병인양요 때 양헌수의 군대가 덕진진을 거쳐 정족산성으로 들어가 프랑스 군대를 격파했다. 1871년(고종 8) 신미양요 때는 미국 함대와 포격전을 벌인 곳이다. 1976년 성곽과 돈대를 고치고 남장포대도 고쳐 쌓았으며 문의 누각도 다시 세웠고, 당시의 대포를 복원하여 설치하였다.
지금 덕진진에는 문루인 공조루(拱潮樓), 남장포대, 덕진돈대 그리고 대원군이 세운 해문방수비(海門防守碑)가 있다. 해문방수비에는 ‘海門防守他國船愼勿過’라고 새겨졌다. ‘바다의 문을 막고 지켜서, 다른 나라의 배가 지나가지 못하도록 하라.’는 의미이다.
Ο 강화 광성보
- 지정 : 사적
- 입장료/요금 : 무료
- 개방시간 : 09:00∼18:00
- 휴관일 : 연중무휴
- 관람소요시간 : 50분
- 주차정보 : 무료주차
- 주요시설 : 안해루, 광성돈대, 용두돈대, 손돌목돈대, 쌍충비각, 무명용사비, 신미순의총, 광성보휴식공간
- 편의시설 : 화장실 2개소, 매점, 공원, 휴식공간 등
- 소재지 :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 833
- 문의처 : 032-930-7070
강화의 해안 경계 부대인 12진보 가운데 하나로, 1658년(효종 9)에 설치됐다. 용두돈대.화도돈대· 오두돈대·광성돈대와 1874년(고종 11)에 축조된 오두정포대를 관할하였다.
1745년(영조 21)에 성을 고쳐 쌓으면서 성문을 만들어 안해루(按海樓)라 하였다. 이곳은 1871년(고종 8) 신미양요 때 가장 치열한 격전지였다. 초지진과 덕진진을 거쳐 광성보에 이른 미군은 상륙하기 전에 포격으로 광성보를 초토화했다.
이미 병인양요 때 광성보에 근무한 바 있던 어재연이 포격을 피할 안전한 장소에 군사들을 숨겼다가 상륙하는 미군에 맞서 싸웠다.
조선군은 물러서지 않고 분전했으나 무기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패했다. 병사들 대부분이 전사했다. 미군은 광성보 전투 후 소득 없이 물러갔다. 미군의 처지에서 볼 때 신미양요는 전투에서 승리하고 전쟁에서 패배한 사건이었다.
광성보 안에는 광성돈대, 어재연·어재순 형제의 충절을 기리는 쌍충비각, 이름을 알 수 없는 전사 장병들을 모신 신미순의총, 손돌목돈대, 용두돈대가 있다.
Ο 강화 선원사지
- 지정 : 사적
- 개방시간 : 연중
- 휴관일 : 없음
- 관람소요시간 : 30분
- 주차정보 : 대형 10대
- 소재지 : 강화군 선원면 와말길106번길 23
- 문의처 : 934-8484
선원사지는 1976년 동국대학교 강화도학술조사단이 강화도 일원에 대한 지표조사에서 처음 발견하였다. 발견 당시 이곳에서 몇 개의 주춧돌을 비롯하여 보상화무늬 전돌, 범자(梵字) 새긴 기와, 지붕에 얹었던 잡상들을 확인하고, 선원면 도감마을, 도감산에 있는 사지이므로 학술적·역사적으로 가치가 있어 지역의 연원을 기초하여 1977년에 사적 제259호 강화선원사지로 지정되었다.
1996년부터 4차례에 걸친 발굴조사 결과 건물터, 축대와 연화문 기와, 금동탄생불, 청동나한상 등이 출토되어 사찰과 관련된 유적으로 규명되고 있으나. 조선왕조실록」에서 전하는 고려팔만대장경을 판각했던 선원사(禪源寺)터로 볼 수 있는 고고학적 자료가 확인되지 않아 이에 대하여는 장기적인 조사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참고로 동 유적에 대한 4차에 걸친 발굴조사(’96년∼’01년) 결과 독립된 건물지 21개소와 부속 행랑지 7개소가 확인되었으며, 건물들은 북고남저의 지형 위에 동서로 긴 4개의 층단을 두고 빼곡히 들어서 있다. 중앙부 대형건물지(기단길이 38m)에는 삼존불을 지탱한 것으로 보이는 불단 유구가 확인되었으며, 5개의 건물지에서 온돌시설이, 그리고 배수시설 등이 확인되었으나 탑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지역은 건물지가 집중돼 있는 중심구역으로 남북길이 180m, 동서너비 180m정도이다.
출토유물은 자기류, 기와류, 소형 청동탄생불, 금동나한상, 탄화된 사경편 등이 주를 이루고 있으며, 자기류(총 2,300여점)의 대부분은 12세기 후반∼14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청자편이 대부분(94%)이고, 기와류는 평기와가 가장 많고, 막새, 취두, 잡상 등이 출토되었는데, 이중 막새류는 연화문, 범자문, 귀목문이 대부분이고 ‘박씨(朴氏)·유씨(劉氏)’명(銘) 막새도 있고, 취두편은 모두 21개가 조사되었다
Ο 강화 갑곶돈대
- 지정 : 사적
- 소재지 : 강화군 강화읍 갑룡길 26
돈대는 작은 규모의 보루를 만들고 대포를 배치하여 지키는 곳이다.
갑곶돈은 고려가 1232년부터 1270년까지 도읍을 강화도로 옮겨 몽고와의 전쟁에서 강화해협을 지키던 중요한 요새로, 대포 8문이 배치된 포대이다.
삼국시대 강화를 갑비고차(甲比古次)라 부른데서 갑곶이라 이름이 전해오는 것으로 보기도 하고, 고려 때 몽고군이 이곳을 건너려고 하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안타까워하며 ‘우리 군사들이 갑옷만 벗어서 바다를 메워도 건너갈 수 있을 텐데’라 한탄했다는 말에서 유래했다는 전설도 있다.
조선 1644년 강화의 요충지마다 군대 주둔지를 설치할 때, 제물진에 소속된 돈대로서 1679년에 완성되었다. 고종 3년(1866) 9월 병인양요 때 프랑스의 극동함대가 600여명의 병력을 이끌고 이곳으로 상륙하여 강화성과 문수산성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10월에 정족산성에서 프랑스군은 양헌수 장군의 부대에게 패하여 달아났다.
1977년에 옛터에 새로이 옛모습을 되살려 보수, 복원이 이루어졌다. 지금 돈대 안에 전시된 대포는 조선시대 것으로 바다를 통해 침입하는 왜적의 선박을 포격하던 것이다.
Ο 강화 석릉
- 지정 : 사적
- 소재지 : 강화군 양도면 길정리 산 182번지
고려 21대 희종(熙宗, 재위 1204∼1237)의 무덤이다. 『고려사』에 의하면 ‘1237년(고종 24) 8월에 희종이 57세로 법천정사(法天精舍)에서 승하하자 낙진궁(樂眞宮)으로 옮겨졌으며, 10월에 덕정산(德政山) 남쪽 석릉에 장례를 지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희종은 1204년에 신종의 양위를 받아 즉위하였다.
최충헌이 권력을 남용하자 1211년 내시 왕준명(王濬明) 등과 함께 최충헌을 죽이려다가 실패하였다.
이로 인해 최충헌에 의해 폐위당하여 강화로 쫓겨났다가 이어 용유도로, 교동도로 옮겨졌다가 1219년 귀양에서 풀려나 개경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1227년 복위의 음모가 있다는 무고로 다시 강화로 쫓겨났다가 교동으로 옮겨졌고, 법천정사에서 죽었다. 묘역의 하단에는 정자각이 위치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흔적을 확인할 수 없으며, 2단에 1기의 석인상, 봉분 옆에 1기의 석인상이 남아있다.
특히 석릉은 강화에 있는 다른 왕릉과는 달리 봉분 뒤편에 곡장을 두른 것이 특징이다. 조선 현종 때 강화유수 조복양이 찾아내어 다시 보수하였으며, 매년 능참봉을 파견하여 관리하였다고 한다.
1895년 이후 관리가 소홀해졌고 일제 강점기 때에 도굴되어 폐허가 되었던 것을 1974년 보수 정화하였다. 2002년에는 남한에 있는 고려왕릉 최초로 발굴하여 유구를 확인하였고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발굴 당시 청자편을 비롯하여 관장식용 금속류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Ο 강화 가릉
- 지정 : 사적
- 소재지 : 강화군 양도면 강화남로633번길 16
고려 제24대 원종의 비 순경태후 김씨(順敬太后 金氏)의 무덤이다. 순경태후는 최씨 무인집권자 최우의 사위인 김약선의 딸로서 1235년(고종 22) 원종이 태자가 되자 태자비인 경목현비가 되었으며, 다음해에 충렬왕을 낳고 사망하였다.
1262년(원종 3) 정순왕후로 추대되고 아들인 충렬왕이 즉위(1274)하여 순경태후로 높여졌다. 가릉은 강화에 있는 왕릉과는 달리 지상식 석실 구조를 갖추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현재 석실의 전면에는 유리벽을 설치하여 내부를 볼 수 있도록 되어있다.
일반적으로 봉분 뒤에는 반달 모양으로 두둑하게 토성(土城)을 둘러쌓거나 돌담을 쌓은 곡장이 있으나 가릉에는 사성(莎城), 곡장(曲墻)이 없이 약간 경사진 평지에 봉분을 쌓아 올린 형태이다. 묘역은 3단의 장대석단을 설치한 것으로 보아 고려시대 왕릉의 형태를 갖추었음을 알 수 있다.
봉분이 붕괴되고 석조물은 파괴된 채 폐허가 되었던 것을 1974년 보수하였고, 2004년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발굴한 후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봉분 주변에는 현재 한 쌍의 석수가 있고 봉분 앞에는 석인상 한 쌍이 남아 있을 뿐 석물들이 파괴 또는 유실되어 당시의 모습을 확인할 수 없다.
Ο 강화 곤릉
- 지정 : 사적
- 소재지 : 강화군 양도면 길정리 산 75
고려 제22대 강종의 비 원덕태후 유씨(元德太后 柳氏)의 무덤이다. 원덕태후는 종실 신안후(信安候) 성(珹)의 딸로 왕실 동성을 피하기 위하여 유씨라 하였으나 누구의 성을 따랐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유씨는 1212년(강종 1)에 왕비로 봉해졌고 연덕궁주(延德宮主)라 하였으며, 고려 23대 고종의 어머니이다.
이후 원덕태후로 추존되었고, 1253년 정강(靖康)의 시호가 더해졌다. 곤릉은 전체적으로 3단으로 되어 있다. 봉분과 석축, 곡장(曲墻)은 붕괴되고 석조물은 없어진 채 폐허가 된 것을 1974년 보수, 정화하였다. 본래 묘역은 고려 후기의 왕실 묘제를 따라 문·무인석의 석조물이 있었다고 전해지지만 현재는 묘표만 남아 있다. 상단에는 곡장이 파괴되어 없어졌고 그를 대신해서 봉분 뒤에 반달 모양으로 두둑하게 토담을 둘러쌓아 놓았고 그 안에 원형 봉분이 있다.
봉분하단 전면에는 둘레돌이 일부 복원되어 있다. 2단 중앙에는 작은 묘표가 있는데, 묘표에는 ‘고려원덕태후곤릉(高麗元德太后坤陵)’이라 새겨져 있다.
일반적으로 2단에는 석인상이 배치되어 있는데 곤릉에는 석물이 모두 유실되어 흔적을 찾아볼 수 없으며 하단에는 정자각이 위치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자리가 정비되어 있다. 2004년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발굴하였고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Ο 대한성공회강화성당
- 지정 : 사적
- 개방시간 : 10:0018:00
- 휴관일 : 연중무휴
- 관람소요시간 : 30분
- 주차정보 : 무료
- 소재지 : 강화군 강화읍 관청길27번길 10
1900년에 한옥으로 지어진 대한성공회 성당이다. 대한성공회의 초대 주교인 고요한(Corfe,C.J.)에 의하여 건립되었다. 강화성당은 서유럽의 바실리카(Basilica)양식과 동양의 불교사찰양식을 과감하게 조합시켜 건립하였다는 것이 특징이다.
교회의 내부공간은 바실리카양식을 따랐고, 외관 및 외부공간은 한식 목구조와 기와지붕으로 되어있는 불교사찰의 형태를 따랐다. 성당의 전체적인 건물 배치는 서쪽에 출입문을 두어 서구 형태를 취하면서 전체적으로는 배(船)모양을 본 떠 뱃머리인 서쪽에는 외삼문 및 내삼문과 성당종을 배치하고, 중앙에는 성당을 두었다. 후미에는 사제관을 배치하여 특이한 양식을 보여주며 우리나라 건축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는 유적이다.
목재는 압록강에서 운반해다가 사용하였으며, 경복궁 공사에 참여했던 대궐 목수가 건축을 맡았다. 입구 계단, 외삼문·내삼문·성당·사제관을 동남향 종축으로 배치한 외부공간의 구성이 불교사찰의 구릉지가람(丘陵地伽藍)과 비슷하며, 성당 앞마당에는 큰 보리수나무 두 그루가 서 있다.
외삼문, 솟을대문은 팔작지붕으로 담장과 연결되어 있으며, 동쪽 칸에는 초대 사제(司祭)의 묘비가 서 있다. 내삼문은 평대문에 역시 팔작지붕이고, 서쪽 칸은 종각으로 쓰이고 있으며, 성당은 정면 4칸, 측면 10칸의 바실리카식 평면구성이다.
성당 내외부에는 서양식 장식이 거의 없는 순수한 한식목조건축이면서도 교회기능에 충실한 내부공간을 연출함으로써, 초기 성공회 선교사들의 토착화 의지가 나타나 있을 뿐만 아니라, 한국기독교 역사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는 성당건물이다.
Ο 강화외성
- 지정 : 사적
- 소재지 : 강화군 강화읍 , 선원면, 불은면, 길상면(적북돈대~초지진 까지 23Km)
강화외성은 고려 23대 고종이 1232년 몽고의 침입으로 강화도로 천도한 뒤 고종 20년(1233) 해안 방어를 위해 적북돈대로부터 초지진까지 23km에 걸쳐 쌓은 성이다. 조선 1690년(숙종 16)에 숙종이 허물어진 외성의 축성을 명했고, 1691년(숙종 17)에 공사를 시작하여 1692년(숙종 18)에 여장까지 갖춘 외성이 완성됐다.
숙종 때 완성한 강화 외성의 규모는 숙룡돈대에서 초지돈대까지이다. 대개 삼군문(금위영, 어영청, 훈련도감) 소속 병사들이 동원돼서 쌓았고 일부 구간은 강화유수부가 자체적으로 쌓았다. 숙종 이후 외성이 붕괴되는 등의 이유로 여러 차례에 걸쳐 보강 공사가 벌어진다.
토성(土城)이었던 외성이 부분적으로 석성(石城)이 되고 또 벽돌로 쌓은 전성으로 변화를 겪기도 한다. 강화유수 김시혁이 주관하여 1742년(영조 18)~1744년(영조 20)에 걸쳐 외성을 개축했는데 이때는 흙도 돌도 아닌 벽돌로 성을 쌓은 것이다.
이것이 강화전성(江華?城)이다. 오두돈대 밑으로 전성이 보수 및 복원되었다. 강화전성은 인천시 기념물 제20호로 지정되었으나 강화 외성 전체가 사적 제452호로 승격 지정됨에 따라 그 안에 포함되어 해제되었다.
Ο 제5로 직봉-강화 망산 봉수유적(江華 望山烽燧)
- 지정 : 사적
- 소재지 : 인천 강화군 내가면 외포리 산131
봉수(烽燧)는 횃불인 봉(烽)과 연기인 수(燧)로 변방의 급한 소식을 중앙에 전하는 통신 방법으로 조선시대까지 쓰였다. 밤에는 횃불을 올리고 낮에는 연기를 올려 신호를 보냈다.
대개 봉수는 해발 100m~300m의 너무 높지 않은 산 정상부, 주변 일대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에 설치됐다. 망산봉수는 덕산봉수라고도 불린다. 덕산은 해발 240m이다. 조선 초에는 진강산 봉수의 신호를 받아서 별립산 봉수로 전달했고, 조선 후기에는 진강산 봉수의 신호를 받아 교동 화개산 봉수로 전했다.
망산봉수는 제5로 직봉 봉수로 사방 8.3m 내외의 정방형 기단에 원형 연대를 갖추고 있었다. 동쪽 기단은 단수가 2단이며 높이가 0.8m이다. 서쪽 기단은 단수가 4단이며 높이가 1.3m이다. 남쪽 기단은 단수가 5단이며 높이가 1m이다. 북쪽 기단은 거의 붕괴됐는데 높이가 0.4m이다. 연대는 지름이 4.5m이고 높이가 3.4m이다.
<글 : 문화재청, 강화군 / 사진:강화로닷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