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자료 (10개)

Ο 김취려 묘

  • 지정 : 문화유산자료
  • 소재지 : 강화군 양도면 하일리 산71

고려 후기의 장군 김취려의 묘이다. 그는 고려 후기 예부시랑을 지낸 김부(金富)의 아들로 본관은 언양이며, 음서(蔭敍)를 통해서 정위(正尉)에 임명되었다. 그후 1219년에는 몽골군과 동진국과 힘을 합쳐 강동성에 웅거한 거란군을 격퇴하는 전과를 올렸으며, 1232년에는 문하시랑평장사에 올랐다. 사람됨이 정직하고 검소하였으며, 아랫사람을 바르게 다스려 누구도 그를 속이지 못하였다고 한다.

고종 21년(1234) 강화에서 사망하였다. 김취려 묘지석에는 ‘공은 갑오년(고종 21, 1234) 2월 14일에 미미한 병세를 보이다가 21일에 갑자기 돌아가시니 향년 63세이다. 천자(天子)께서는 몹시 슬퍼하며 조문하고 부의를 내리셨다. 공은 복야(僕射) 조언통(趙彦通)의 따님을 부인으로 맞아들여 세 아들과 딸 하나를 두시고 뒷일을 처리하게 하였다.

7월 12일에 진강산(鎭江山) 대곡동(大谷洞) 서쪽 기슭에 예장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어 묘지석이 발견된 곳에 강화군과 언양김씨 종친회에서 묘소를 새롭게 정비하였다. 묘역에는 원형의 봉분 앞에 망주석 한 쌍과 상석이 갖추어져 있으며, 하단 부분에 묘역을 정비하고 종친회에서 건립한 비석이 세워져 있다.


 

Ο 무태돈대

  • 지정 : 문화재자료
  • 소재지 : 강화군 하점면 창후1리 151-1

돈대는 해안가나 접경 지역에 쌓은 소규모 관측·방어시설이다. 병사들이 돈대 안에서 경계근무를 서며 외적의 척후 활동을 비롯한 각종 수상한 정황을 살피고 대처한다. 적이 침략할 때는 돈대 안에 비치된 무기로 방어전을 펼친다.

1679년(숙종 5) 5월에 완성된 48돈대에 이후 5개 돈대가 추가로 지어졌다. 48돈대는 황해도·강원도·함경도 승군 8,900명과 어영청 소속 어영군 4,262명이 80일 정도 걸려서 쌓았다. 돈대 축조를 기획하고 감독한 이는 병조판서 김석주였고 실무 총괄은 강화유수 윤이제였다.

무태돈대는 1679년(숙종 5)에 쌓은 48돈대 가운데 하나로 인화돈대·광암돈대·구등곶돈대·작성돈대와 함께 인화보의 관할 하에 있었다. 방형 구조로 둘레가 145m, 석벽의 높이는 120~530㎝이다. 창후리 포구에서 북쪽 길로 간다.


Ο 화도돈대

  • 지정 : 문화유산자료
  • 소재지 : 강화군 선원면 연리 54번지

돈대는 해안가나 접경 지역에 쌓은 소규모 관측·방어시설이다. 병사들이 돈대 안에서 경계근무를 서며 외적의 척후 활동을 비롯한 각종 수상한 정황을 살피고 대처한다. 적이 침략할 때는 돈대 안에 비치된 무기로 방어전을 펼친다. 1679년(숙종 5) 5월에 완성된 48돈대에 이후 5개 돈대가 추가로 지어졌다.

48돈대는 황해도·강원도·함경도 승군 8,900명과 어영청 소속 어영군 4,262명이 80일 정도 걸려서 쌓았다. 돈대 축조를 기획하고 감독한 이는 병조판서 김석주였고 실무 총괄은 강화유수 윤이제였다. 화도돈대는 1679년(숙종 5)에 쌓은 48돈대 가운데 하나로 오두돈대·광성돈대와 함께 광성보에 속했다.

원래는 화도보 소속이었으나, 1710년(숙종 36)에 화도보가 폐지되면서 광성보의 지휘를 받게 되었다. 방형 구조로 둘레가 129m이다.


Ο 강화서도중앙교회

  • 지정 : 문화유산자료
  • 소재지 : 강화군 서도면 주문도길 256-1

서도중앙교회는 1923년 교인들의 헌금으로 지어진 한옥 예배당이다. 정면 4칸, 측면 7칸으로 구성된 팔작지붕의 건물인데, 종탑부로 사용되던 건물 전면의 구조물까지 합하면 측면이 8칸이다.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2층으로 구성된 종탑부의 상층지붕은 우진각지붕으로 꾸몄다. 건물 내부의 전면에는 강단 위에 설교대를 두었으며, 바닥에는 마루를 깔았다.

이 건축물은 우리 전통 목조건물의 가구형식을 바탕으로 서양교회를 지었다는데 큰 의미를 지닌다. 주문도지역에 기독교가 처음 전파된 것은 1893년 무렵이었는데, 1902년 윤정일이 감리교 전도인이 되어 주문도에 들어가 전도활동을 한 후 본격적으로 기독교가 전파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서도중앙교회가 1905년 문을 열었다. 1923년 교회 신도의 헌금에 의하여 현재의 모습으로 개축되었으며, 1978년 주문교회에서 서도중앙교회로 명칭을 변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Ο 참성단중수비

  • 지정 : 문화유산자료
  • 소재지 : 강화군 화도면 해안남로1826번길 14

참성단을 새로이 보수한 후 그 내용을 기록해 놓은 것으로, 가파른 바위 윗면을 손질하여 그 위에 비문을 새겼다. 마니산 꼭대기에 자리잡은 참성단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조선 숙종 때 강화유수를 지내던 최석항(崔錫恒, 1654~1724)이 관내를 순찰하며 마니산에 올랐다가 이곳이 무너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당시 전등사 총섭이었던 승려 신묵에게 명하여 새로이 고쳐 짓도록 하였다.

최석항은 ‘참성단은 단군이 돌을 쌓아 단을 만들어 하늘에 제사하던 곳’이라며 ‘수천 년이 지나도록 후손들이 우러러보며 공경할 곳이니 고쳐서 완전하게 하는 일을 어찌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적었다. 비는 조선 숙종 43년(1717) 5월에 마련해 놓은 것으로, 비문에는 ‘참성단’이라는 이름을 붙인 사연, 참성단에 대한 선조들의 뜻 등에 관한 기록들이 함께 적혀 있다.


Ο 망월돈대

  • 지정 : 문화유산자료
  • 소재지 : 강화군 하점면 망월3리 2107 외

돈대는 해안가나 접경 지역에 쌓은 소규모 관측·방어시설이다. 병사들이 돈대 안에서 경계근무를 서며 외적의 척후 활동을 비롯한 각종 수상한 정황을 살피고 대처한다.

적이 침략할 때는 돈대 안에 비치된 무기로 방어전을 펼친다. 1679년(숙종 5) 5월에 완성된 48돈대에 이후 5개 돈대가 추가로 지어졌다. 48돈대는 황해도·강원도·함경도 승군 8,900명과 어영청 소속 어영군 4,262명이 80일 정도 걸려서 쌓았다.

돈대 축조를 기획하고 감독한 이는 병조판서 김석주였고 실무 총괄은 강화유수 윤이제였다. 망월돈대는 1679년(숙종 5)에 쌓은 48돈대 가운데 하나로 진무영에서 직접 관할하는 영문 소속 돈대였다. 방형구조로 둘레 124m, 석벽의 높이는 180~300㎝이다. 대개 돈대들이 해안가 높은 지대에 위치하는 것과 달리 망월돈대는 갯가 낮은 지대에 설치됐다.

그래도 시야를 가리는 방해물이 없어 경계초소로 부족함이 없다. 남쪽으로 계룡돈대, 북쪽으로 무태돈대가 있다.


Ο 선수돈대

  • 지정 : 문화유산자료
  • 소재지 : 강화군 화도면 내리 1831

돈대는 해안가나 접경지역에 쌓은 소규모 관측·방어시설이다. 병사들이 돈대 안에서 경계근무를 서며 외적의 척후 활동을 비롯한 각종 수상한 정황을 살피고 대처한다. 적이 침략할 때는 돈대 안에 비치된 무기로 방어전을 펼친다. 선수돈대의 원래 이름은 검암돈대이다.

대개의 돈대들이 병조판서 김석주와 강화유수 윤이제에 의해 1679년(숙종 5)에 세워졌으나 검암돈대는 그 이후에 쌓았다. 정확한 축조 시기를 알 수 없는데, 1691년에서 1695년 사이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방형 구조로 둘레가 97m, 석벽의 높이는 200~320cm이다. 미곶돈대·북일곶돈대·장곶돈대와 함께 장곶보의 관할 하에 있었다.


Ο 원층사지

  • 지정 : 문화재유산자료
  • 소재지 : 강화군 하점면 이강리 산 177

별립산(別立山) 남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이 절터를 마을 사람들이 아직도 원층골이라 부르고 있는 사실로 보아 『강도지(江都誌)』에 언급된 원층사터 임을 알 수 있다. 사찰의 규모는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석재유물로 미루어 꽤 큰 사찰로 생각된다. 불상은 보이지 않지만 큼직한 연꽃무늬 대좌(臺座)가 남아 있어서 석불상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또한 석탑 부재들도 꽤 많이 남아 있는데 특히 석탑 옥개석은 모두 남아 있으며, 3단의 옥개받침이나 독특한 수법은 고려시대의 작품임을 잘 말해주고 있다. 『강도지』의 기록대로 고려 조정이 강화도로 도읍을 옮겼던 시기의 사찰로 추정되며, 현존하는 석탑이나 불상의 부재들은 당시의 불교 미술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Ο 철종외가

  • 지정 : 문화유산자료
  • 소재지 : 강화군 선원면 철종외가길 46-1

조선 제25대 왕인 철종(재위 1849∼1863)의 외숙인 염보길(廉輔吉)이 살던 집이다. 1853년(철종 4)에 강화유수 정기세(鄭基世)에게 명하여 지은 이 건물은 원래 안채와 사랑채를 좌우로 두고 H자형 배치를 취하고 있었으나, 행랑채 일부가 헐려 지금은 ㄷ자 모양의 몸채만 남아 있다.

사랑채와 안채가 一자형으로 연결되어 있고 안채와 사랑채의 공간을 작은 담장으로 간단히 분리하였다. 당시 일반 사대부 집의 웅장한 규모와는 다르게 규모는 작으나 예스럽고 우아한 아름다움이 묻어나는 건물이다. 후원에는 염씨 집안의 묘가 있다.

철종은 정조의 아우인 은언군(恩彦君)의 손자이며, 전계대원군(全溪大院君)의 아들로 어머니는 용성부대부인(龍城府大夫人) 염씨(廉氏)이다. 1849년 헌종이 후사가 없이 죽자 대왕대비 순원왕후(純元王后)의 명으로 19세의 나이에 왕위를 계승하였다.


Ο 전등사 대조루

  • 지정 : 문화유사산자료
  • 소재지 : 강화군 길상면 전등사로 37-41

대웅보전 앞 마당 바로 밑에 세운 대조루는 기둥을 세워 지면과 사이를 두고 지은 누각이다. 지은 시기를 알 수 없으나 1748년(영조 24) 주지 초윤(楚允)과 화주인 보학(寶學) 등이 고쳐지었다고 하며, 1841년(헌종 7)에는 화주 연홍 등이 중건했다고『전등사본말사지』에 명기되어 있다.

그 뒤 크고 작은 보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앞면 5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새 날개 모양의 익공 양식으로 비교적 간략한 수법이다. 원래 대조루의 건물 용도는 사중의 행사 및 연회나 손님 접대 등의 목적으로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대조루 안쪽부터가 본격적인 불국 정토이자 성스런 수행 공간이 된다. 특히 대조루 계단 아래서 대웅전의 본존불을 향한 자연스러운 조망이 가능토록 포치한 주의 깊은 건축 설계는 부처님에 대한 존신과 귀의를 더욱 고취시키는 효과를 나타내고 있다.

< 글: 문화재청,강화군 / 사진: 강화로닷컴>